예술의 상상/beyond-letter 78

[강남몽] 어디사세요?

서울에 올라와서 호기심 어린 눈빛과 함께 가장 많이 나에게 달려드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던 막 상경한 시골처녀는 서슴없이 '봉천동이요'라고 대답했더랬다. 지하철 노선도를 보지 않고도 서울 시내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무렵에야 난 비로소 그 질문의 의미를 깨달았다. 내 대답을 들은 이들이 왜 이내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는지도. 다음 자취방을 정하는 일은 그 동네의 땅 값과 관련된다는 것도. 왜 이들은 어디 사는지를 이렇게 자주 물어볼까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자 자연스레 서울에 집을 마련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목표로 하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의‘지금 그리고 여기'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때로는 나의 속물..

[고령화가족]가족-그 진부하고도 새로운 만남

가족. 가장 가깝지만 서로를 가장 서로를 모르는 관계가 아닐까? 제목만 보고 노년인구가 증가하는 한국사회의 보고서 혹은 고령화라는 새로운 사회문제를 다루는 소설이려니 지례짐작했더랬다. 책을 읽는 도중에는, 신파라며 몇번 짜증을 내고 그러면서 공감되는 인물들에 모습에 마음이 쨘하고 코끝이 시리고 감각을 자극하는 폭력장면(?) 묘사에 인상을 몇번 찌푸리고. 그러고 나서야 이 소설이 천착하는 바는, 전혀 새롭지 않는 가족이라는 주제. 구질구질하고 방안의 낡은 앨범속 어딘가 고스란히 끼워두고 있다가 '내가 늘 보관하고 있었소'하고 꺼내놓을 만한 주제인 그 가족임을 깨달았다. 다만 그 방식과 소재에 있어서 이야기꾼 천명관의 빠릿빠릿함과 여유가 드러난다. 고래 이후 3년만에 귀환한 천명관의 장편소설은 한마디로 '가..

[로빈슨크루소,아후벨그림]아무것도 쓰지 않고 모든것을 말해주는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차치하고, 이 책은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인간이 자연 앞에서 야생의 삶에서 어떻게 삶을 영위하고 살아남는지 바라보라고 요구한다. 아후벨이라는 작가는 단지 이야기를 보조하는 일러스트가 아닌 한장한장에 심혈을 기울이며, 각 장만으로도 독립적인 작품이라고 이야기 할 만한 퀄리티를 보여준다. 가느다란 실같은 흑백의 선에서 시작한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는 그가 긴항해를 마치고 아내가 기다리는 집에 들어올 때까지 흑백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는 바다와 항해를 꿈꾸는 사람이었다. 꿈에서도 그의 바다는 형형색색의 물결과 오색창연한 파도로 뒤덮인다. 그리하여 다시 배에 몸을 싣고 떠난다. 정말로 해적처럼 무서운. 야수파의 그림이 연상되는 대담한 선으로 그는 파도와..

[유쾌한 하녀 마리사] 유쾌한 이야기꾼 천명관

천명관에게 가장 어울리는 수식어는 아무래도 이야기 '꾼'인 것 같다. '꾼'이라는 말은 세련된 프로페셔널이기보다는 뭉툭하지만 매니악스러운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그의 입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의 한문장 한문장을 유쾌하게 웃으며 따라가다가보면 어느순간 '아, 웃을 대목이 아니었구나!'를 외치게 될것이다. 이런요소들은 각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이어져서 전혀'해피'하지 않은 상황으로 막을 내린다.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노력하지만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드는 상황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이야기들은 역시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갖추고있다. [프랭크와 나] ,[13홀].. [二十歲]는 감히 김승옥의 [내가훔친여름]의 단편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탄탄한 작가의 역량을 잘보여준다. 적당한 냉소와 유머는 감상적으로..

원근법

원근법은 일정 시점에서 본 물체와 공간을 눈에 보이는 대로 평면에 표현하는 방법으로,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의 평면상에 재현하는 방법이다. 깊이를 표현하는 방식으로써 원근법적 공간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400년동안 유럽미술을 지배해 왔다. 그 바탕은 시각적 평면에 대해 직각을 이루는 모든 선들이 지평선 위의 한 점인 소실점으로 모이게 되어 있는 것으로, 14세기 미술이 낳은 논리적 산물로서 15세기 초에 플로렌스에서 완성된 단일 시점 원근법이었다. 그러한 수학적-시각의 원리들은 1420년 , 이전에 필리포 브루넬리스키에 의해 발견되어 1425년 마사치오가 프레스코화 에 적용하였고, 건축적인 공간 속에 인물들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를 확립했으며, 거리에 따라 대상에 일정한 크기를 부여했다. 또 다른 ..

[재와 빨강] 낯설 것 없는 일상의 디스토피아

[재와 빨강] 낯설 것 없는 일상의 디스토피아   『재와 빨강』에서 편혜영은 또 다시 우리를 낯선 곳으로 데려간다. 그녀의 인물들은 일상을 벗어난 잿빛 장소(『사육장 쪽으로』,『아오이 가든』)에서 원인과 대처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건을 경험한다. 우리는 소설 속에 그가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만나는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겪고 있는 사건이 현실인지 꿈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 숨 막히는 이야기들을 다 읽은 후에, 한 숨을 돌리며 마지막장을 덮는다. 그때서야 절대 발을 들여놓기 싫은 소설의 장소들이 내가 앉아있는 이곳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미 수 십장의 페이지를 넘기며 읽었던 이야기들이 일련의 경고 표지판이었음을 말이다. 그가 공항 여기저기 붙어있는 검역안내문과 전염병 예방수칙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