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7

리디북스의 마케팅에 감탄하며 읽은 소설들

파리에 온 이후로, 한국 책을 읽을 일이 현저히 줄어든데다가 전자책에 영 적응을 못해 한국 소설을 읽을 일이 많이 없었다. 일단 나는 시소설,인문학 편식독자인데다가 몇년전만해도 전자책 플랫폼에는 도서 수가 너무 적었다. 지금처럼 신간소설을 바로 전자책 플랫폼에 게시하지도 않았고.. 몇년 만에 리디북스에 접속해 아이패드로 신간 소설들을 찾아읽으니 신세계다. 한국어로 읽으니 이 술술 읽히는 재미란.. 일단 한국 소설 책을 검색하며 느낀점은, 2-3년의 공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위 10위권내에 있는 인기있는 소설 중 대다수가 내가 이미 읽은 책들이라는 것. 그만큼 새로운 작가와 새로운 작품보다는 기존의 작가들이 상을 타거나 매스컴에 나오는 바람에 묻혀있던 과거의 작품들이 재조명 받는 분위기. 그리하여 82년..

[내 젊은 날의 숲, 죽음과 생명이 잇대어 있는 곳]

1. 나무 편백나무가 유명하다던 그 수목원 길을 엄마와 걸었다. 여름엔 이 편백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삼림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즐비하다던 그 숲. 11월부터는 입산이 금지되었기에 숲의 둘레만을 걸으며 보아야 했지만, 오히려 그 거리만큼 나무의 모습은 더 잘 드러났다. 엄마와 나는 때로 빠르게 그리고 느리게 걸으며, 때때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나무의 호흡을 받아들였다. 어느 때보다 요즘 엄마와 난 나무가 있는 곳을 즐겨 찾는다. 산을 좋아하며 시적인 감성을 중년까지 유지하는 엄마,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육체의 움직임이 뇌의 움직임보다 더 생산적이라는 것을 믿게 된 스물아홉의 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병간호를 통해 아빠의 의식을 되살리거나 사회에서의 성공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기..

[고래] 그것은 삶의 법칙이었다.

"그것은 ...의 법칙이었다." 보잘것 없었던 버려진 한 여자의 삶이 무한대로 팽창해가는 과정을 연결하는 천명관식 후렴구이다. 읽는 내내 구역질나게 만드는 인간의 '욕망'을 대범하게 주조해놓았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금복의 죽음에 대한 묘사 _p.301) 삶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을 갖다 붙여놓은 듯,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불운을 나열한 듯, 그렇게 금복의 삶은 흘러흘러간다. 어떠한 가치평가도..

[강남몽] 어디사세요?

서울에 올라와서 호기심 어린 눈빛과 함께 가장 많이 나에게 달려드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던 막 상경한 시골처녀는 서슴없이 '봉천동이요'라고 대답했더랬다. 지하철 노선도를 보지 않고도 서울 시내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무렵에야 난 비로소 그 질문의 의미를 깨달았다. 내 대답을 들은 이들이 왜 이내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는지도. 다음 자취방을 정하는 일은 그 동네의 땅 값과 관련된다는 것도. 왜 이들은 어디 사는지를 이렇게 자주 물어볼까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자 자연스레 서울에 집을 마련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목표로 하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의‘지금 그리고 여기'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때로는 나의 속물..

[유쾌한 하녀 마리사] 유쾌한 이야기꾼 천명관

천명관에게 가장 어울리는 수식어는 아무래도 이야기 '꾼'인 것 같다. '꾼'이라는 말은 세련된 프로페셔널이기보다는 뭉툭하지만 매니악스러운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그의 입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의 한문장 한문장을 유쾌하게 웃으며 따라가다가보면 어느순간 '아, 웃을 대목이 아니었구나!'를 외치게 될것이다. 이런요소들은 각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이어져서 전혀'해피'하지 않은 상황으로 막을 내린다.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노력하지만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드는 상황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이야기들은 역시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갖추고있다. [프랭크와 나] ,[13홀].. [二十歲]는 감히 김승옥의 [내가훔친여름]의 단편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탄탄한 작가의 역량을 잘보여준다. 적당한 냉소와 유머는 감상적으로..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도시에서 살아남는 몇 가지 방법

『2010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0 도시에서 살아남는 몇 가지 방법 2000년대를 정의할 만한 화두는 무엇일까? 문학은 80년대의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이데올로기적 담론, 90년대의 자본주의와 인간소외라는 주제를 소중하고 진지하게 담아내왔다. 2000년대에 떠오른 전혀 새로운 주제와 문제의식들을 문학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담아내고 있을까? 나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지표로 을 추천한다. 문학동네에서 펼쳐놓은 은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성취임은 물론이고, 2000년대라는 동시대에 대한 문학의 사회적인 통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를 대표할 만한 작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임에 틀림없다.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 대답해 본다면, 2000년대의 화두는..

바리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 생명의 물은 어디 있죠? 노인은 팔을 쳐들 기운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뒤로 조금 돌려보이면서 말한다. 그런게 있을 리가 있나. 저 안에 옹달샘이 있긴하지만, 그건 그냥 밥해먹는 보통 물이야 ... 나는 씁쓸하게 말한다. 생명의 물 따위는 없더라. 까막까치는 다시 자지러지게 웃는다. 까르르르 멍텅구리 네가 마신 그게 그거. 아무도 가져올 수 없지, 생명의 물은 -황석영, 바리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