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beyond-letter

[내 젊은 날의 숲, 죽음과 생명이 잇대어 있는 곳]

유산균발효중 2010. 12. 28. 16:20
 
1. 나무
 
편백나무가 유명하다던 그 수목원 길을 엄마와 걸었다. 여름엔 이 편백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삼림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즐비하다던 그 숲. 11월부터는 입산이 금지되었기에 숲의 둘레만을 걸으며 보아야 했지만, 오히려 그 거리만큼 나무의 모습은 더 잘 드러났다. 엄마와 나는 때로 빠르게 그리고 느리게 걸으며, 때때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나무의 호흡을 받아들였다. 어느 때보다 요즘 엄마와 난 나무가 있는 곳을 즐겨 찾는다. 산을 좋아하며 시적인 감성을 중년까지 유지하는 엄마,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육체의 움직임이 뇌의 움직임보다 더 생산적이라는 것을 믿게 된 스물아홉의 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병간호를 통해 아빠의 의식을 되살리거나 사회에서의 성공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 절망적이거나 힘들지 않았다. 눈 덮인 숲속의 나무들이 그러하듯.
 
 
눈 덮인 숲속의 나무들은 눈과 숲의 익명성 속에서도 개별자로서 외롭거나 억눌려 보이지 않았다. 나무의 개별성과 숲의 익명성 사이에는 아무런 대립이나 구획이 없었다. 나무는 숲속에 살고, 드문드문 서 있는 그 삶의 외양으로서 숲을 이루지만, 나무는 숲의 익명성에 파묻히지 않았다.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는 외롭지 않고, 다만 단독했다. 그것이 사람과 나무의 차이였고, 나는 그 차이를 처음 만나는 젊은 장교 옆자리에서 알게 되었다. p.63
 
이 소설은 숲에 대한 이야기이기보다는 나무에 관한 이야기이며, 거대한 이상이나 대의 앞에 갈등하는 인간이기보다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끼는 익명의 인간이 느끼는 구체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공무도하가』이후, 김훈의 소설이 달라졌다는 평가는 섣부르다. 오히려 그가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삶과 죽음의 경계 없음이 이 소설에서도 계속된다고 믿는다. 식물이나 꽃 사진으로 이루어진 달력을 넘기는 듯, 이 소설은 수목원의 계절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김훈은 세밀화를 그리는 조연주를 세밀화의 방법으로 그려낸다. 조연주의 시점에서 그녀의 감정을 파고드는 세밀화는 사진처럼 순간의 장면을 포착하지 않고, 대상의 움직임과 내적인 인과를 설명해내야 한다. 그렇기에 김훈에게서 다소 뭉툭하게 보였던 감정표현이 더 자세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조연주, 김중위, 안요한의 외모를 알 수 없다. 다만 그 인물이 살아온 삶의 방식과 습관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들을 더 보편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 이들은 소설을 이루는 일종의 나무이다. 이 나무들은 무언가 자취를 남기고 있다.
 
 
2. 숲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큰 두 축은 연주를 중심으로 민통선 옆 수목원의 풍경과 연주의 가족사이다. 이 두 배경은 서로 겹치고 서로를 반영한다. 아빠와 엄마를 모두 닮은 신우가 자신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듯, 그녀 역시 아버지가 횡령한 돈으로 대학에 다녔고, 자신을 이루고 있는 아버지의 흔적으로 인해 고뇌한다. 나무는 한그루씩 모여 자신과 닮은 모양의 숲을 만들어낸다.
 
조연주는 아버지로부터 흘러들어 온 부정직한 돈이 자신의 생애를 이루고 있음에 대해 갈등한다. 아버지 역시 그의 아버지가 느낀 무력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말단 공무원들이 벗어날 수 없는 관행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말년의 할아버지, 좆내논과 같이 힘없고 늙은 말과 같이 살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바뀌어 있다. 아버지에 선택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판단이란 없다. 교도소에서 나온 이후 아버지는 병에 걸린다. 그리고 연주에게 ‘미안허다’라는 말을 남기며 죽어간다. 아버지와 연주의 인연, 나무와 나무의 얽힘으로부터 숲이 이루어진다. 나무는 다만 홀로 존재한다. 그러나 숲은 그렇지 않다.
 
안요한 실장과 그의 아들 신우 사이의 인연도 숲을 이루는 또 하나의 축이다. 언뜻 안요한이라는 인물은 차갑고 객관적이며 자신의 환경과 동떨어진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나무 같은 사람이다. 안요한의 아픔이 발견되면서 소설은 또 다른 갈등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그의 아픔은 바로 자폐증세 때문에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 신우이다. 유독 맑고 깊은 눈을 가진 아이, 관찰력이 뛰어나고,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인 신우에게 연주는 일말의 안타까움을 느끼고 그림을 가르쳐 준다. 이 작업을 통해 안요한과 조연주의 관계가 조금 더 발전되고, 신우의 자폐도 회복되길 바라지만 사태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된다. 신우는 아버지를 닮은 것만큼 어머니를 닮아있었고, 그 어머니에게로 보내진다.
 
숲을 이루는 또 다른 나무인 김중위는 이 소설에서 튀는 인물이다. 다른 이들처럼 어두운 구석도, 삶의 어려움도 드러나지 않는 기능적인 인물이다. 김중위가 건네준 명함으로 이 소설은 열린 구조가 되고, 연주의 삶에도 일말의 위로와 연대가 찾아온다. 숲이 단지 외로움과 고독함으로 끝나지 않게 만들어 주는 작가의 따뜻한 장치이기도 하다.
 
 
3. 삶
 
이 소설은 유독 죽음에 집착한다. 할아버지의 쓸쓸한 죽음, 좆내논의 죽음, 미술학원 강사의 자살,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수목원 해설사의 죽음까지. 계속되는 죽음이 챕터를 이루며 등장한다. 또한 김중위의 소대가 맡고 있는 6.25 전사자들의 유예 발굴 작업에 참여하게 된 연주는 죽음이 남겨 놓은 뼈들을 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죽음이 남긴 것은 단지 뼈만은 아니었다. 뼈에 남겨진 구멍들을 통해 연주는 오히려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발견한다.
 
.... 뼈들은 무력해 보였고, 속수무책으로 헐거워서 다시는 부활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 적막한 칼슘의 잔해들이 한때는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의 생명의 기둥이며 허우대였던 것인데, 그 부활할 수 없는 뼈에 아직도 남아 있을 생명의 흔적을 그려낼 수는 없었지만, 내가 뼈의 실물을 보면서 그 흔적을 느꼈듯이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그 흔적을 느껴주기를 나는 바랐는데, 그리지 못한 것을 느껴달라는 소망은 염치없어 보였다.
...사라진 것들의 부재를 그려서 사라지기 전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 구멍들은 흰 개미들의 공동 주택단지였는데, 개미는 사단의 요청이 아니었으므로 그리지 않았다. 살아서 우글거리고 물고 뜯고 싸우는 개미를 그렸더라면 나의 작업은 덜 힘들었을 것이다. p.306
 
서로 물어뜯고 싸우면서 자신의 생명을 확인하는 개미들, 이들의 삶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하고 처절한 싸움이었다.
 
...한 무더기가 죽으면 또 한 무더기가 뼛구멍 속에서 기어나와 싸움터로 나왔다. 개미들의 싸움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요하고도 처절한 싸움이었다. p.174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싸움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것일까? 우리가 마땅히 죽음이라 칭한 그곳으로부터 삶은 시작된다. 눈 오는 날 통유리 창가 자리에 앉아 단숨에 읽은 이 책은 나를 고요한 숲으로 데려가 주었다. 숲은 누군가에겐 일상을 벗어나 기분전환을 하게 해주는 곳이거나, 자연을 더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관찰장이거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작업장일 것이다. 나에게 숲은 죽음을 준비하는 곳이자, 그것이 끝이 아니며 또 다른 이와 또 다른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곳이기에 역설적으로 삶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이런 비논리적인 엉킴을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딱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마음의 일은 때때로 몽매하다. 그 몽매한 마음을 더 펼쳐 보인다면, 산맥에 흩어진 백골들 중에서 한 점 백골의 단면을 그리는 일과 억만 년을 피고 지는 무수한 꽃들 중에서, 한 떨기 꽃의 개별적 생명의 현재성을 그리는 일과, 젖니 빠진 신우의 그림을 지도하는 일은 결국 같거나,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서 한 술로 엮여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의 일은 결국 몽매하다. p.207
 
그래서 결국, 겨울눈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겨울눈을 하나의 완성된 통일체로 그려낼 수가 없고 그 안쪽을 잘라내서 볼 수밖에 없다. 겨울눈 그림은 솜털이 덮여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그림 한 점과, 겨울눈을 열어서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해부도 한 점을 따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 p.323


한 해를 보내며 읽은 이 소설은 흥분되고 분주한 마음을 가라앉도록, 고요하고 숙연하게 해 주었다. 숲을 이루는 익명의 한 인간이 거대한 전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음, 살아있음 자체의 경외감이 생겨나는 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