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beyond-letter 78

[바람이분다 가라] 얼음으로 만든 칼

그녀의 글은 여전히 섬세하고 영민하다. 마치 얼음을 깎아 만든 칼 같다.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며 피와 먹, 빨강과 검정,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밤새 내린 눈이 뒤덮인 세상을 볼 때의 눈부심. 그것은 경외감이기도하고, 공포이기도하고, 모든 것을 숨기고 있는 대상에 대한 신비감이기도하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그랬다. ㅊㅅ주의자의 인물과 어쩌면 가장 극단에 있을지도 모를 인물들은 집착적이고 격렬하다. 그럼에도 한강의 인물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자기를 보존한다. 비록 그것이 죽음이라해도. ++소설에 덧붙이는 것은 역시 사족이다. 한강은 역시 나의 베스트!! ++글과 이미지의 조화가 뛰어나다. #1. 사랑, 공포와의 동의어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로드

삶의 이면에는 죽음이 있다. 아니 죽음의 이면에는 삶이 있다. 이 두 문장은 언뜻 같은 의미처럼 보이지만, 삶에 대해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혹은 극한적인 악한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사람. 그리고 그가 걸어가고 있는 그 '길'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린 여러가지 모양의 이야기들이 있다. 오래 잔상이 남았던 영화는 미스트였는데, 인간의 내면을 꽤 깊은 곳까지 파헤치기 때문이다. 미스트의 결말부에 자신의 딸들을 구하기위해 안개를 해치고 나갔던 여인이 구조대의 차로 유유히 지나가며 살아남은 주인공에게 보내는 눈길은 주위의 모든 것을 생존이라는 명목으로 밟고 올라선 세상 속 누군가에게 보내는 영화의 시선이다. 그러나 로드의 디스토피아는 이보다..

[2010이상문학상 아침의 문] 그의 진화

아침의 문을 다 읽었을때, 나는 ㅂ민규의 종적을 되돌아 보아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확실히 이전보다 섬세하고 강인하다. 이는 단편이가진 매력이기도하고. 삼미는 확연한 20대의 질풍노도였고 핑퐁은 과도기였으며 파반느는 과잉이었다. 아침의 문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그와 같은 정서를 지니지는 못했음에도 그를 쉽사리 끊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를 재확인시킨다. 안정적인 서사와 완결성.은 과거보다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계속해서 그를 읽는 독자로서 바라는 소박하지만 어려운 주문은 억지스럽지 않은 여성캐릭터의 탄생이다.

오후 네 시 Les catilinaire

오후 네시마다 똑같은 모습으로 두시간씩 우리집의 거실을 차지하고 있는 육체 덩어리가 있다. 그는 옆집 남자, 베르나르댕 베르나르댕은 어떤 인물인가. 우리 고문자의 얼굴에는 침착함이나 온화함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요컨대 그의 얼굴에는 서글픔만이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포르투갈 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우아한 서글픔이 아니라, 빠져나갈 길 없는, 짓누르는 듯한, 차가운 서글픔이었다. 왜냐하면 그 서글픔이 그의 비계 속에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37)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를 우리집 거실에서 쫓아내는것. 그리하여 전원생활의 아늑함과 자유의 극치를 맛보는 것.하지만 상대는 만만치 않다. (100) 이런 냉혹한 싸움에서 이기는 데는 더 똑똑하다든지 더 사려깊다든지 하는 것은 아무 ..

아담도 이브도 없는...

아멜리 노통의 특이한 문화적 이력이 반영된 흥미로운 에세이. 벨기에 대사관의 딸로 일본에서 5살까지 자랐던 아름다운 기억은 일본을 되찾고 일본인과 일본 문화에 대한 호감을 느끼게 하며 심지어 일본인으로 살아가고픈 마음에 일본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그녀가 만난 일본 갑부총각 린리는 철저하고 규범적이며 가장 급진적인 외향에 숨겨진 폐쇄적인 정서를 지닌 일본을 대변한다. 그에게 호감과 흥미를 느끼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유로운 문화적 교류와 호기심을 채워줄 만한 요소들이었을 뿐. 사랑이라는 것조차도 구획에 딱딱 맞는 문화는 사실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에덴동산이라는 아름다운 공간에 결국 아담과 이브는 없는.... 후지산을 오르며 자연 본능을 느끼는 그녀가 공감이 되면서도 한편으로 한 개인이 가진 민족적 편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