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beyond-letter

[재와 빨강] 낯설 것 없는 일상의 디스토피아

유산균발효중 2010. 7. 2. 16:58
 

[재와 빨강] 낯설 것 없는 일상의 디스토피아

 

 

 

『재와 빨강』에서 편혜영은 또 다시 우리를 낯선 곳으로 데려간다. 그녀의 인물들은 일상을 벗어난 잿빛 장소(『사육장 쪽으로』,『아오이 가든』)에서 원인과 대처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건을 경험한다. 우리는 소설 속에 그가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만나는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겪고 있는 사건이 현실인지 꿈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 숨 막히는 이야기들을 다 읽은 후에, 한 숨을 돌리며 마지막장을 덮는다. 그때서야 절대 발을 들여놓기 싫은 소설의 장소들이 내가 앉아있는 이곳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미 수 십장의 페이지를 넘기며 읽었던 이야기들이 일련의 경고 표지판이었음을 말이다.

그가 공항 여기저기 붙어있는 검역안내문과 전염병 예방수칙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긴 것처럼...(p.8)

SF에서나 등장하는 먼 미래의 디스토피아로 여겨지는 C국은 그가 임시방역원의 일상을 살게 되는 곳이다. 결국 일상에서 가장 멀어 보이는 문제의 장소가 곧 일상의 이면이다. 마치 모든 게 타버린 재 속에서 스러져가는 빨간 불꽃을 발견하는 것처럼. 그 빨간 불꽃은 곧 남아있는 한 조각까지도 모두 재로 만들 것이다.

 

『재와 빨강』을 이루는 에피소드들은 각각의 단편으로 읽어도 무방할 만큼의 독립성 지니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축조된 미로를 헤매는 듯하다. 미로의 문은 하나의 열쇠로 열리는데, 모든 것을 잃은 인간이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부재가 만들어내는 미로

 

 

그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 끊임없는 부재를 경험한다.

  C국의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트렁크 가방을 잃어버림으로 부재는 시작된다. 본국과 연결된 가느다란 선 역할을 해 줄 가방의 부재는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될 그의 미래를 예견한다. 복도에 둔 것으로 기억되는 가방을 찾으려고 숙소를 나섰을 때, 복도의 모든 문은 마치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것처럼 굳게 닫혀있다. 아무도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굳게 닫힌 문과 어두운 복도에서 그는 애써 떨쳐내고픈 모종의 불안함을 느낀다. C국의 4구역은 버려진 땅처럼 조용하다. 거리에 높게 쌓인 쓰레기와 다리 밑에 흐르는 시커먼 물만이, 악취를 제공한 인간의 존재를 확인시켜 줄 뿐이다.

  본사에 파견되어 부푼 기대를 가진 그에게 회사에서는 당분간 휴가를 가질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그 후로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줄 자리의 부재는 그가 왜, 어디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그의 친구인 유진과 내연의 관계인 전처는 이제 세상에 없다. 칼로 갈기갈기 찢겨진 그녀의 시신만이 유진의 입을 통해 그에게 전달된다. 그는 전처의 살해 용의자로 쫓기게 된다. 전처의 부재 상황은 그가 C국에서 시궁창에 몸을 던지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여전히 그녀의 죽음은 모르는 채. 그는 멍든 팔에 대한 기억도 없으며, 유진과 술을 마시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본국을 떠나면서 기억도 함께 묻어 버렸다는 듯이.

  소설에서 거대한 모티브로 작용하는 C국의 인사담당자 ‘몰’의 부재는 더욱 복잡한 미로를 만들어 간다. ‘몰’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C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명의 사람이자 누군가 버린 유니폼에 쓰인 이름으로. 동시에 ‘몰’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 휴가를 통보하는 그 한 순간에만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는 이름이 부재한다. 그 누구의 이름도 명확하지 않다. 주인공인 그와 전처, 직장의 동료들도 이름이 없다. 선배의 이름 대신 어류선배이고 노숙자들의 이름 대신 2번 혹은 8번등 숫자이다. 게다가 ‘몰’은 마치 사물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처럼 사용된다. 우리는 이름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 누구도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계. 혹은 내 이름이 이것이어도 되고 저것이어도 되며, ‘몰’이어도 되는 세계를 떠돈다.

누군가의 부재. 그 부재가 만든 공백으로 서서히 죽음이 스민다.

 

 

미로를 빠져나가기 위해

 

 

주인공이 불행에 내몰리는 원인에 대하여 C국의 전염병 때문에, 전처의 떠남 때문에 혹은 본국 동료들의 눈총에 몰려진 어쩔 수 없음이라고 항변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것이 그의 불행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을 한결 편하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 맘을 편하게 해 줄만큼 양심적이고 숭고한 인간은 아닌 게 분명하다.

과거를 씻어내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하는 투철한 의지가 있고, 누군가의 추격과 의심을 피해 아무리 더러운 쓰레기 위에라도 기꺼이 몸을 투척할 배짱이 있으며, 말라붙은 쥐꼬리에 피를 묻혀가며 더 많은 이익을 노리기도 하며, 심지어 자신의 부정이 들통 났을 때 상대를 죽일만한 여유도 있다.

단지 그것이 C국이어서는 아니다. 아내와의 여행에서 만난 원숭이 떼의 습격 에피소드에서처럼, 자신을 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복수해줄 준비도 되어 있다. 그 방어가 또 다른 공격이 될지라도. 이렇게 복선 가득한 행동들이 모여 일반 명사인 그를 이루고 있다. 그의 존재가 불편한가?


가방은 원숭이와 육탄전을 벌이는 동안 이미 다른 원숭이가 채갔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자신이 필사적으로 지키고 싶었던 것은 그 무엇도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원숭이의 꼬리를 씹어대고 팔뚝과 허벅지를 찌르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아내 말고는 없었다.
그가 갑자기 아내에게 화를 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후에도 더이상 아내를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결국 여권과 지갑을 지켜내지 못한 것처럼, 이보다 더한 상처를 얻어도 아내를 지키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은 전적으로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다.(161)

 

 

미로의 열쇠-잔혹한 생명력

 

 

잔인하고 더럽다. 피를 붉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붉은 피를 재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 아니겠는가? 결국 이 복잡한 미로의 열쇠는 인간의 잔혹한 생명력 아니겠는가. 그는 C국 곳곳에서 방역활동을 하고 쥐도 잡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일상을 얻기 위해 그는 자신의 분신인 쥐와 먹을 것을 다투고, 쓰레기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살아보려는 욕망으로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굳이 그의 삶이 망가졌다고 속단하지 말자. 삶의 곳곳에서 우리의 욕망의 가방을 빼앗아가는 원숭이의 꼬리를 물어뜯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테니까. 물론 그 기억은 곧 없어지고, 몸에 아주 작은 멍과 상처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쥐는 모두가 혐오하고 피해가지만 결국 인간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사력을 다해야 할 일이라고는 한낱 쥐를 잡는 일뿐임을 실감했다. 그는 더럽고 볼품없는 쥐 한마리가 우연히 이끈 삶의 궤적을 언제든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잡는 한마리의 쥐는 그를 다시 낯선 인생으로 내몰지도 몰랐다. C국에 온 것, 쓰레깃더미로 투신한 것, 공원에서 부랑생활을 한 것이나 하수도로 떠밀려 간 것은 모두 믿을 수 없지만 쥐 한마리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그러니 지금의 인생에 어떤 미련이나 애착이 없는 그로서는 다시금 쥐 한마리가 가져올 우연을 기다리며, 쥐를 잡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