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beyond-letter

[은교] 욕망, 창조의 시작

유산균발효중 2010. 6. 24. 11:13

 

 

박범신 갈망 삼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은교>를 단숨에 읽었다.

가끔씩 휙휙하고 소설이 읽힐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날이었나보다.

 

박범신의 글은 구김없이 매끈하게 읽힌다.

그에 대한 유일한 기억은 <촐라체>. 이 책 역시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더랬다.

 

<촐라체> 역시 인간의 육체와 자연에 대한 탐미주의와 욕망이라는 박범신의 주제와 만나고있었다. 가끔씩 겹쳐지는 소재들도 한 작가의 것임을 증명한다.

 

 

 

 

 

 

 

 

 

 

소재나 주제 면에 있어서 <은교>는 그리 새로운 소설이 아니었다.

이미 인간의 욕망에 관해서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듣고 읽어왔고, 중년이나 노년 남성이 소녀에 대해 가지는 판타지는 롤리타류의 소설로 분류될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은교>로 대표되는 욕망의 대상.  즉, 죽어있는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는 죽은 시체 같은 육체를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는 그것으로 만들만한 대상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적요나 서지우가 지닌 은교에 대한 탐욕의 측면에서 이 작품을 독해하다보면, 은교의 한 단면만을 보게된다. 나는 오히려 은교는 이적요와 서지우가 만들어낸 창조물에 불과하며 이 두 인물의 변증법적 욕망의 이중주로 <은교>를 읽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생존에 대한 갈망, 쓰는 것에 대한 갈망, 무언가에 대한 성취욕.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끊임없는 열등감과 우월감. 그 모든 욕망이 만나 은교라는 대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소설이 즐겁지 않다.

중년 남성의 성적판타지가 불편하고, 은교라는 소녀는 끝까지 투명한 이미지로 지켜내고자하지만,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불투명함으로 남겨진다는 점이

성녀이며 동시에 악녀인 은교를 끝까지 남겨두고자 하는 작가의 또 다른 갈망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책은 연재할때의 원 제목인 '살인당나귀' 여야만 한다.

 

이 책의 가장 큰 수확은 시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깊이가 소설의 모든 곳에 베어있다는 점이다. 마치 이 시들을 연결하기 위해 스토리를 만들어 낸것 같다고 해야할까?

시 한편한편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이야기를 보조하는 듯 하지만,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알았다.

박범신이라는 작가는 단지 시 만을 즐거움을 위해 읽는다했다.

다른 책들은 글을 쓰기 위한 밑거름이라고.

 

결국 즐거움이라는 상태는 새로운 창조와 에너지를 낳는구나 했다.

누군가 즐긴다고 하던가? 그럼 그는 꼭 무언가를 창조하리라. 움하하하

 

 

 

덧.

엥? <은교>에 대한 리뷰에서 갑자기 인생의 교훈으로 넘어가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