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우뚱 묵상 148

기업무를 자, 속량자

요즘 나의 교회에 관련된 결정과 맞물려 많은 생각거리를 주는 룻기, 공과공부 중, 한국말을 못하는 유진은 늘 불어로 읽고 불어로 대답한다. 이 아이에게 기업무를 자를 설명하려는데, 불어 성경에는 avoir la responsabilité de prendre soin de qqn으로 번역되어 있다. Parole de vie 번역본은 다소 의역이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현대어로 쓰여져 읽기 쉬운데, 이 번역본이 강조하고 있는 율법의 가르침은 책임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를 돌보고 그를 살아가도록 돕는 책임이란 것. 보아스와 룻. 그들의 관계가 화려하고 낭만적인 로맨스가 아닌 책임과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법에 기초한 관계였다는 점이 오늘 나의 눈에 들어왔다.

갸우뚱 묵상 2014.07.01

시편 36편 1-12절: 쉬운성경 번역본

다윗의 시, Seigneur, la source de la vie est en toi 주님, 생명의 샘이 주께 있습니다. 라는 제목 (PDV) 으로 지어진 이 시가 오늘의 기도가 되었다. 울어도 보고 화도 내보고 침묵도 해보고 애써 소화해내려고 날렵한 논리를 들이밀어보지만, 소용이 없다. 다윗의 이 기도를 여러번 되새기며, 단순히 악하다는 말로 묘사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그들을, 악하고 거짓된 말로 온 뼈와 피와 근육이 이루어진 그들을, 생명의 샘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을 떠올렸다. 오늘의 우리와 꼭 닮은 원수를 만난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이 장면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주님, 악한 자들이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입니다. 악한 자들의 죄에 관하여 주님께서 내게 알려주셨습니다..

갸우뚱 묵상 2014.04.30

하나님의 셈법

교사들과 나눌 공과를 준비하며 묵상한 내용들이 위로가 되었다. 빼기 더하기 곱하기 나누기라는 얄궂은 제목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장면을 스케치하고 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만남과 정확하게 겹치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은 불신자나 배신자인 베드로가 아니라, 그분이 선택하시고 사랑하시는 베드로에게 하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다시 고기 잡는 것 말고는 돌아갈 곳 없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 그는 과거의 잘못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 속에서 낚이지 않는 고기르 쫓아다니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또 다시 그물던질 곳을 알려준 그 분에게, 그것도 요한이 귀뜸을 해 주었을 때에야 비로소 아차 하며! 벗은 몸으로 헤엄쳐 다가간다. 사복음서를 ..

갸우뚱 묵상 2014.04.17

용납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이 가진 마음은 몇백데나리온을 받아내서 생활비로 쓰려던게 아니라, 자기가 일만달란트 탕감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여전히 마음 속의 부채의식때문에 몇백 데나리온으로 그것을 갚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용납은 나에게 없는 관용과 이해심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타인을 용납할 인격적 상태에 머물지 못한 차원이 아니라, 십자가의 용서를 완벽하게 믿지못하고, 뭔지모를 죄책감을 은근슬쩍 즐기며 내가 할 일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구나. 정말 답없는 인생이여.

갸우뚱 묵상 2014.04.02

우리의 약함, 하나님의 강함

바울이 하나님께 세 번 구했던 것. 자신의 몸에 가시를 제거해 달라는 기도에 대해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며, 네가 약한데서 곧 온전해진다고 대답하셨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이 강함 되신다는 이 말씀 만큼, 인생이라는 시간을 지나는 순례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힘이 되는 말씀이 또 있을까. 그러나 문제는 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오해에서 비롯된다. 게다가 그 오해는 우리가 '믿음좋은' 그리스도인 임을 반증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잘 차려입은 무시무시한 말을 무책임하게 내뱉기도 한다. 지난 4일동안 이 말씀을 주제로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나도 '본능적'으로 말씀을 곡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아마 그런식의 오해가 내가 알고 있는 성경 그리고 하..

갸우뚱 묵상 2014.02.23

un contenant/un contenu

요즘, "하나님이라는 내용(contenu)을 담고 다니는 그릇(contenant)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주제에 대해 '영성'과 관련해 생각해보고있다. 깨끗한 그릇이어야 하나님을 담을 수 있다는 말이, 종교적인 정결예식을 거친다는 의미가 아님은 명백하고. 그렇다면 그릇으로서, 컨테이너로서의 인간이 그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가 자신이 이용되도록 담아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향해야 함이다. 이러한 조건은 자칫 추상적여보일 수 있다. 뭐 인생의 방향성 같은 매우 장기적인 용어로 대체될 수 있는.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추구는 매우 일상적인 것이며,자질구레하며 동시에 쉽지는 않은 것이다. 내가 담으려는 그 내용물을 찾기까지 그것과 비슷한 수많은 매력적인 대체품들이 ..

갸우뚱 묵상 2014.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