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para-screen 162

악의 평범성(banalité), Hannah Arendt 를 가로질러

한 개인의 행동은 언제나 전체라는 맥락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한나아렌트의 생각은 혹자들의 비판과 같이 악이라는 행위를 개인의 의지나 자율성과 떨어뜨려 놓는다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아이히만에게서 찾아낸 증거들은 유대인인 그녀에게 약간의 위안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읽는 이들에게도 무엇인지 모를 안도감을 준다. 그런 괴물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은, 악이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닌 단순한 결핍으로 보려는 시도. 조금 더 인간적이나, 조금은 빗나간듯한 시도.그렇다고 그녀가 용서를 운운한다거나 관용을 운운하는 순박한 철학자는 아님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었던 시절의 나도 그랬다. '생각없음'을 경계하며, 수동성을 경계하라는. 사유없음이 오늘날 문명의 위기를 가져왔으며, 비..

Tel père, tel fils

번역하면, '부전자전'정도인데, 일본어 원제에 뭐가 더 가까우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개봉한 제목보다는 좀더 내용에 충실한 번역인듯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핏줄과 시간이라는 가족을 이루는 중요한 두 요소를 서로 가장 먼 자리에 두고, 그 중 하나를 택해보라는 과제를 낸다. 분명 매우 아시아적인 사고방식이며, 일본의 현재를 담은 문제의식이다. 가족이라는 제도의 붕괴와 여전히 그것을 지켜보려는 사회적인 합의간의 긴장. 이곳에서도 평이 좋은 것을 보니, 꽤나 유니버셜한 문제가 아닐까싶은 지점. 해를 더 할수록 조금씩 정교해진다. 분명 스토리나 구성이 탄탄해진다는 느낌은 아닌데. 특유의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마 아이들의 자연스런연기와 맑은 눈 때문일테다.

A touch of sin_Jia Zhang-ke

지아장커의 변화에 대해 적응하느라 첫 에피소드에서 좀 버벅거렸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 사회, 인간에 대해 가장 솔직한 감독이라는 판단을 굳혔다. 이 정도쯤 되면 무협영화네, 하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중국영화 황금기의 무협영화 스타일을 살리고 싶었단다. 시골 동네에서 이뤄지는 경극장면도 인상적이다. 전통과 현대를 겹치고, 무속신앙과 근대자본을 겹친 상징들을 곳곳에 사용한다. 7,80년대 공장 노동자들과 개발독재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사건사고들 역시 실제로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사를 통해 접한 지아장커가 각색한 내용이다. 모든 에피소드가 폭력과 살인, 죽음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그가 바라본 지금의 중국이 그리 밝아보이진 않나보다. 타자의 눈으로 본 타자의 역사, 그리고 그의 눈을 통해 본 지금..

Casse-tête chinois

5 중국식 퍼즐, 뭔가 해결하기 어려운 복잡한 상황을 이르는 관용구라는데, 아마 유럽 문화권에서 한자 혹은 한자로 된 낱말퍼즐을 바라보는 암담함을 드러낸 표현이 아닐까 싶다. 영화의 한장면에서 오드리 토투가 고객인 중국인 회사와의 회의 중에 중국어로 쏼라쏼라 하는데, 정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불어를 또랑또랑 진정한 파리지엔의 모습으로 다소 차갑게 발음하는 것과는 달리, 성조를 의식한 발음과 악센트는 정말 웃음이 난다. 아마 아시아인이 하는 불어를 듣는 프랑스인들도 그렇겠지. 여튼 세드릭 크라피쉬 정도로 흥미롭고 산뜻한 연출을 할 자신이 없다면, 이런 궁상맞은 사랑이야기나 가족이야기 혹은 타문화에서 살아가는 찌질함은 단지 신파가 되버릴 뿐이다. 혹자는 그의 이야기를 막장드라마라고도 하니 말 다했지뭐...

LA MARCHE: 1983-2013: 30 ans de Marche pour l'Egalité

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고, 1983년에 일어난 그 역사적 사건에 대해 찾아보니, 과연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영화는 다소 동어반복적이었지만, 이것을 그냥 뉴스 리포트의 한 꼭지로 읽었다면 울컥했을 것 같다. 약 50일동안 마르세유에서 파리까지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여 평화적인 걷기를 시작한 10명 남짓한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에서 아주 짤막하게 당시 프랑스의 인종차별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나 공격을 당한 사건들을 소개하고 있다. 겨우 30년전의 일이다. 비록 영화는 지루했지만, 역사를 향한 이들의 오마주가 숭고하게 느껴졌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미테랑은 이들을 엘리제궁에 초대해 대화를 나누고 외국인의 체류와 관련된 법을 개선했다. http://blogs.mediapart.fr/blog/maryam-al-sh..

Le Transperceneige, 영화보다 영화관 이야기

이곳의 극장문화는 몇가지가 흥미롭다. 일단 좌석지정제가 없다. 가끔 있는 영화관도 있다던데, 그리 일반화되진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개봉한지 하루 이틀 된 기대작을 보기 위해서는 줄을 서서 대기하기도 한다. 이곳의 줄서기 문화는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일반적으로 영화 상영시간이전 20분정도가 광고시간이다. 걸어서 3분거리인 동네 UGC에 가는 날이면, 집에서 상영시간 지난 10분 후에 출발한다. 티켓 끊어서 상영관에 들어가면 대충 영화 상영시간 도착이다. /그리고 역시, 이들은 영화 시작하기 직전까지 엄청 시끄럽다. 동네에서 개봉하지 않은 설국열차를 보러 Bercy의 엄청나게 큰 상영관으로 갔는데, 제시간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거의 꽉찼다. 개봉일에는 르몽드에 한면을 할애한 비평기사가 실리기도했..

Gravity

이야기의 개연성은 차치하고, 이들이 부유하고 있는 그 끝을 모를 아득한 공간이야말로 온 몸을 아찔하게 했다. 그리고 그 공간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주제와 상징들을 매우 심플하게 담아냈다. 영화라는 오락거리에서 굳이 추상적인 생각을 강요받지 않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공감을 줄 만큼! 다소 밋밋한 스토리와 변화없는 공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전략' 때문이 아니었을까? 최고의 기술력을 동원해, 인간의 능력이 가장 극도로 발달한 분야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결국 그가 하고픈 말은 발을 땅에 디디고 살아간다는 것의 경이로움 이라는 창세기스러운 메시지였다는 것. 그리고 그 말에 위로 받으며 다시 땅의 감촉을 느끼러 나오는 이들에게 자신의 지'점'을 확인시켜주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