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좁은 일상_시즌1 229

분노

물론 이 글은 나의 분노에 대한 정당화로 읽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 J와 나눈 대화를 통해 다시한번 분노없는 아니 분노를 깔끔함으로 감춘이들의 비겁함을 생각하게 된다. 서울에 와서 개인적인 사정을 모른채로 공적인 일로 사람들을 만나면서(물론 교회에서의 관계도 포함이다) 느끼는게 정말 화를 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익명의 타인에게는 굳은 얼굴로 대하지만 얼굴을 맞대는 이에게 저항하거나 그를 부정하거나 분노하는 일은 전혀 없다. 주일 말씀을 들으며 들었던 의문을 덧붙여...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이런 미움과 환멸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일까요? 아직 나의 교만함 때문인가요?

TGIF??

지인에게 날아온 메일로 한두달 전쯤 얼렁뚱땅 facebook에 가입하게 되었다. Google scholar가끔 애용하는 것 말고는..TGIF시대에 그 어느것에도 소속되지 못한 나는 이런 종류의 의사소통 수단에 대해 부담감이 있는게 사실이다. 한 두줄로 왔다 갔다하는 말이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본시 순간의 감정이나 단상에 불과한 것일텐데, 그 말로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다. 상대의 표정을 볼 수 없이 문자로 주고받는 종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언제든 사람과의 관계를 더 따뜻하다거나 깊게 해 준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똑똑하다.

두 죽음

사회적으로 이러저러한 담론을 생산하고 있는 두 사람이 죽었다. 물론 그들은 전혀 다른 영역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활동하던 이들이다. 최윤희씨 부부의 동반 자살은 아침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수많은 주부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나에겐 그녀의 죽음에 대한 체감온도가 그리 높지 않았던 것처럼. 몇년전부터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잦은 입원으로 심신이 고통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길 원치 않는 남편과 동반 자살했다. 이혼을 고민하는 부부들의 문제를 상담해주고, 삶을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수 있는지 조언을 해주던 그녀는 자신의 삶의 고통을 이겨낼 수 없어 죽음을 택했다. 난 자살에 대하여 죽는 것보다 사는게 낫다는 식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대하는 것 만큼..

이름에 대한 단상

엄마는 내 이름을 바꾸려 했단다. 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나 지어준 이름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하얗고 조그만 아이에게 붙여준 것이 끝내 찝찝했었나보다. 그럼에도 내 이름은 거의 삼십년간 변하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보존하고 있다. 이.연.호를 연호라부르는 호라 부르든, 호우라 부르든, 실체는 변하지 않을테니까. 이연호라는 이름이 뇌의 지령을 받아 가슴깊은 곳으로부터 목젖을 울리며 튀어나와 공명하는 순간의 울림은 실체와 그것이 얼마나 어울리는지 가늠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도한다. 꽤 도시적인 이름을 가진 친구의 어렸을적 이름을 들었을때, 난 오히려 이전 그녀의 이름이 그녀의 실체와 더 잘어울린다 여겼다. 최근 이름을 바꾼 한 친구, 생각해보니 난 그녀를 원래의 이름세자로 부르지 않고 내 맘대로 모음을 바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