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para-screen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앙젤리카의 이상한 사례 (2010)>

유산균발효중 2011. 8. 25. 01:11

번쩍하는 푼크툼의 순간

사진 찍은 일을 일상의 전부로 삼는 한 젊은이가 있다.
그의 방 창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고, 방을 관통하도록 매달아놓은 줄에는 크고 작은 사진들이 걸려있다. 무엇을 찍은 것인지 궁금해 해도 소용이 없다. 사진이 창 바깥쪽을 향하여 걸려있기 때문이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 주파수가 맞지 않아 소음을 내는 라디오를 켜놓은 채, 천사에 관한 시를 읽으며 무언가를 끄적이던 이작은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의 2010년 영화 <앙젤리카의 이상한 사례>는 죽은 여인의 사진을 찍은 한 젊은이가 그녀에게 (더 정확하게는 그녀를 찍은 사진 이미지에) 매료되어 사랑에 빠지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는 멜로영화나 미스터리, 초현실주의 영화를 넘나들며 정적인 미장센으로 영화내의 여러 장르를 버무리고 있을 뿐 아니라, 미술·음악·연극·사진 등의 여타의 장르마저 넘나드는, 그러면서도 교만하지는 않은 대가의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앙젤리카(이름 자체로 천사라는 일반명사를 지칭한다)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가족들은 앙젤리카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 사진을 남기고자 한다. 그녀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기억하려는 것이다. 이작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메라의 초점을 맞춘다. 역설적이게도 오로지 앙젤리카 만이 밝은 조명아래 컬러로 표현되어 있다.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가족들은 암흑 속에서 아무 말도 없고 표정도 없다. 흑백의 무성영화의 일부 같다. 삶과 죽음이 정반대로 표현된 이 장면에서 일종의 기괴함이 느껴진다. 이작의 카메라 안에서 흐릿하게 두 개로 보이던 상이 초점이 맞추어지며 하나로 선명해지는 순간, 죽은 앙젤리카는 카메라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고, 생명력 있게 말이다. 이작이 앙젤리카의 사진을 찍는 씬은 이후의 장면에서 계속 변주될 일종의 테마구이다. 흑백에 속했던 이작은 앙젤리카를 찍음과 동시에 컬러 속으로 빠져든다. 앙젤리카의 미소는 단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을 본 이작의 착각이나 판타지였을까?

이작의 카메라가 찍어대는 또 하나의 장면은 인부들이 수작업으로 땅을 파는 모습이다. 그는 언제 없어질지 모를 수작업을 카메라로 박제한다. 그들은 오롯이 자신의 몸을 사용하여 땅을 파는데, 요즘 어디 그런 노동이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살가도의 사진에서 인간의 육체를 사용하는 노동에 대한 경외심을 최전선에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뜨거운 볕 아래 피부를 온전히 드러낸 노동자들이 나무껍질 같은 살갗과 깊게 패인 주름을 드러내는 이작의 사진들은 인간의 물리적 생존 방식을 가장 극단에서 보여준다. 인부들의 사진은 앙젤리카의 사진과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 앙젤리카는 사진 찍는 이작을 의식하고 미소를 보이지만, 인부들은 이작이 없는 것처럼 일에만 몰두하고, 그의 카메라 앞에서 정지 상태로 포즈를 취한다.

 

우리는 죽음이 언젠가는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죽음과의 만남을 늘 지연시키고자 한다. 어떻게 해서든 죽음을 삶과 가장 먼 곳으로 보내고 싶은 욕망을 품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앙젤리카의 현현이 단지 이작의 착각에 불과하리라고 기대한다. 적어도 앙젤리카와 이작이 샤갈의 그림인 <하늘을 나는 연인>의 모습을 보여줄 때까지도 그의 착각이 아름다운 우화로 끝나기를 기원한다. 하지만 올리베이라는 우리의 이런 기대를 무참하게 무너뜨린다. 이작이 꿈에서 앙젤리카에게 건네주었던 그 꽃이 식탁 위에 놓여 있을 때, 이작은 자신이 보았던 앙젤리카의 이미지가 허구가 아님을 확신하게 되고, 그녀를 찾으러 뛰쳐나간다. 이작의 방에서 새의 지저귐이 들리고 앙젤리카가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지는 순간, 이작은 주스티나의 새가 죽었는지를 확인하러 달려온다.

강변의 도시 정경과 쇼팽의 음악은 한편의 수채화처럼, 다음 막을 준비하는 커튼의 역할을 한다. 인물들은 조그만 세트장에 빼곡하게 붙어 있으며, 특히 이작의 방은 잘 연출된 연극 무대 같아 보인다. 이작의 방은 사진을 현상하는 암실임에도 늘 문이 활짝 열려있다. 그 열려진 테라스의 문은 앙젤리카가 들어오는 통로이다. 열려진 틈. 이 틈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스티나가 이작의 죽음과 함께 커튼을 닫을 때까지 계속 열려있다. 죽음을 포착하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사진, 그것을 만들기 위한 암실 말이다. 사진은 현존하지 않는 대상을 ‘지금-여기’로 소환한다. 우리는 사진을 보며 그 안의 대상과 함께 있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 감정을 그대로 느낀다. 나아가 그 이미지는 현실 그 자체가 된다. 현실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며 끊임없이 현실의 틈을 파고든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산자와 죽은 자 사이의 만남에 대해 영화는 어떠한 도덕적인 평가도 내리지 않는다. 이작이 앙젤리카의 사진과 인부들의 사진 사이에서 어떠한 가치평가도 내리지 않듯이. 서로 섞이어져, 무엇이 더 아름답다고 말 할 수는 없는 상태로. 땅을 파서 돌을 거르는 그 작업이 가진 숭고함은 죽음을 대면한 인간이 느끼는 숭고함에 다름 아니다. 현실의 그 벌어진 틈을 파고드는 이미지(환영)의 힘은 좁게는 사진 매체의 이미지로 넓게는 실재를 무수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일상의 모든 이미지로 치환해볼 수 있다. 예술작품의 이미지, 대중 매체의 이미지, 매일 마주치는 타인의 얼굴, 일상에서 만지고 먹고 바라보는 모든 것을 통해 삶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하나의 이미지가 일상에 쩍 하고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착각이나 환상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된다. 이는 사진의 존재론이자 영화의 존재론이며, 한 노감독의 자기 고백이라고 읽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