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para-screen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경계 허물기

유산균발효중 2011. 8. 4. 01:15

예술, 현실을 카피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경계 허물기

 

1. 들어가며

 

한 때 미지의 감독이라 불렸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이제는 너무 익숙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1987년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시작으로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고, <올리브나무 사이로> (1994), <체리향기>(1997) 등의 작품이 연이어 호평을 받으면서 그에 대한 관심이 이란 영화에 대한 호기심으로까지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 90년대의 작품은 대중과 평단의 지대한 관심을 얻었고, 자파르 파나히나 마흐 말바프, 알리레자 라이시안 등의 감독이 칸을 거쳐 국제영화제를 통해 빈번하게 소개되기도 했다. 새로운 장르와 제 3세계의 영화에 목말라하던 시네필의 갈증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요건을 갖추었던 그의 출현은 꽤 시의성이 있었다. 눈을 쉬게 해줄 만한 시적이고 아름다운 영상, 잊고 있던 삶의 여유를 만끽하게 해 주며, 낯선 지역을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도시화가 진행되기 이전의 이란의 작은 마을에서 촬영하고 비전문배우들이 연기하고, ‘어린 아이’를 소재로 하여 친근감을 더했다. 90년대 그의 영화들은 연달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체리향기),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특별상(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0년대 이르러, 키아로스타미의 행보가 조금 달라졌다는 의견과 함께 이전과는 다른 평가를 받게 된다. <텐>(2002) 이후로 그의 작품은 과도하게 형식주의적이며 추상화되었다며, 대중과 평단의 주목을 끌지 못하게 되고, 자연스레 국내에서 그의 영화를 접하기에는 예전만큼 쉽지 않아졌다. 90년대에 일었던 이란영화 붐은 이제 막을 내린 것인가? 키아로스타미에 대한 ‘그 시절’의 관심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새로운 형식의 영화에 대한 대중의 갈증? 이란이라는 낯선 나라에 대한 제국주의적 궁금증? <텐>(2002)과 <티켓>(2005), <쉬린>(2008)을 거쳐 올해 개봉한 <사랑을 카피하다>(2010)까지, 확실히 90년대에 보았던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와는 사뭇 달라 보이는 이 영화들을 자리매김하고 재평가하려는 논의가 필요함을 느꼈다. 이 글을 통해 여전히 키아로스타미가 추구해왔던 영화를 통해 ‘삶의 진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을 읽게 되길 바란다. 더불어 이란 삼부작을 통해 성공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 이 거장은 끊임없는 자기 변신과 형식적 실험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음을 확인해보고 싶다.

먼저 영화의 장르에 대한 케케묵은 질문에서 시작하자.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우리는 장르영화의 어디쯤에 위치 시켜야 할까? 여전히 그는 기존의 장르영화를 겨냥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아마추어 배우와 전문배우들을 넘나들며 자유자제로 춤을 추는 듯, 자유로운 그의 영화를 또 다시 조망해 볼 필요가 있겠다. <사랑을 카피하다>라는 멋진 작품이 우리 앞에 차려져 있으니 말이다. 대중들에게는 줄리엣 비노쉬로 인해 주목을 받는 <사랑을 카피하다>는 명백히 키아로스타미의 작품 세계 내에서 해석하고 조명되어야 한다. (본 글에서는 편의상 국내에 소개되어 그의 이름을 알린 90년대 영화들을 초기영화로, 2000년대 그의 영화들을 최근 영화로 통칭하여 부르는 섣부른 범주화를 시도하였다.)
 

2. 시공간의 경계를 허문다.

 

동시대 예술의 가장 특징을 꼽으라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바로 ‘탈장르화’가 아닐까? 자신의 예술 장르 안에서 무한한 변신을 꾀해 온 각각의 장르들은 서로의 장르를 자연스레 넘나들고 있다. 미술관에서 보는 영화, 극장에서 듣는 음악, 영화관에서 보는 그림은 이제 너무나도 익숙하다. 이러한 탈장르화의 이면에는 자신의 장르를 더욱 공고하고 우월한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함께 녹아있다. 영화는 어떤가? 동시대 수많은 이들이 영화 속의 명화, 영화로 듣는 음악을 운운하지만 막상 영화가 지닌 시간과 공간을 다 담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이처럼 영화라는 예술이 다른 장르와 극명하게 구분되는 지점은 여전히 시간의 예술이라는 사실이 아닐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가 고수하는 ‘시간에 대한 실험’을 자신의 주요한 테마로 다루고 있다. 그는 허구의 시간을 다루지 않고, 영화 안의 인물들과 함께 호흡하는 실제의 시간을 그린다. 초기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등장했던 롱테이크는 그가 포착하고자 한 시간의 문제를 전면에 드러낸다. 마지막 씬에서 그는 매우 긴 시간동안 인물들이 카메라를 등지고 매우 작아져서 심지어는 형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가도록 혹은 차로 달리도록 만든다. 우리는 그들의 시간을 오롯이 느끼며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끝까지 쫓아가 관찰해야만 한다. 옴니버스 영화 <티켓>에서도 시간은 기차가 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가는 동안에 일어난 일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 인물에 대한 어떠한 설명이나 내러티브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가장 전면에 내세운다. 이 실험이 극에 달한 영화는 <쉬린>이다. 얼굴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캄캄한 극장 안에 앉아있고, 90분 동안 상영하는 연극 혹은 영화는 소리만을 들려준다. 카메라는 하나의 미장센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며, 변하는 것이라곤 인물들의 표정이나 작은 움직임뿐이다. 그것도 어깨 위 상반신만. 영화 속 인물들과 영화를 보는 우리는 똑같은 시간을 보낸다. 아마도 90분이었을 영화 속 쉬린 이야기의 러닝타임을 동시에 경험하며, 시간의 제약을 벗어버린 영화는 역설적으로 그 상영시간에 얽매이는 재밌는 상황을 연출한다.

키아로스타미의 단골 메뉴인 자동차 씬 역시 시간을 있는 그대로 흐르게 한다. 특별한 편집이나 클로즈업, 정지 화면 없이 자동차의 흔들림을 느끼며 계속되는 <체리향기>에서 그랬듯이, <텐>에서 우리는 인물의 차가 흘러가는 시간을 그대로 느낀다.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단조롭지만 섬세하다. 바람이 불기도하고, 해가 비치기도하고, 터널을 지나기도한다. 이는 <사랑을 카피하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녀와 제임스가 대화를 나누는 자동차 씬은 키아로스타미표 드라이브 장면을 보여준다. 9시 이전에 떠나야 하는 제임스에게 도시 근교를 가이드 해주기 위해 차에 태우는 그녀. 그들이 느끼는 그만큼의 시간만큼 우리도 경관을 바라보며, 둘의 이야기를 훔쳐 들으며 함께 떠나게 된다. 영화가 끝나도 아직 9시는 오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의 결말도 알 수 없다.

이처럼 그의 영화는 기다림을 전제로 한다. 롱테이크의 기나긴 장면을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 선문답 같은 두 인물의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들의 여정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 그녀들의 표정이 왜 시시각각 바뀌는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매우 인내심을 갖고, 점프 컷이나 몽타주 장면이 전혀 없이 단조로운 그녀들의 얼굴을 주시해야만 한다. 새로운 사람을 여기저기로 실어 나르는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선, 좁은 차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선, 그녀와 함께 드라이브해야 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기다림이며, 영화의 시간을 허문다. 영화가 허물어놓았던 시간적 제약을 스스로 덧씌운다. 영화인척 하지 않으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세밀하게 극적인 그 시간을 말이다.

 

3. 사람과 사람의 경계를 허문다.

 

왜 기다림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가? 낯선 이들 사이에 긴장이 이완되는 시간이 아닐까? 흐르는 시간 속에 한 장면 안에 속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인물들은 서로 마주보기를 꺼려한다. 그래서 그는 마주볼 필요가 없는, 눈을 마주치며 맞장구치지 않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자동차 안의 두 인물을 설정한다. 그러다 못해 커다란 스크린 혹은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익명의 수많은 인물을 동시에 배치하기도 한다. 극장, 혹은 자동차라는 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지 않고 앞만 보고 앉아있는 인물들은 상대의 반응과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출한다. 자동차라는 익숙한 공간은 매우 사적인 공간이자 변화무쌍한 공간이다. 때론 자신을 표현하기에 용이한 공간이기도 한다. 일상적인 만남의 공간-예컨대 카페나 야외, 서점이나 공원 등-에서라면 대화를 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긴장과 속도가 필요할 텐데, 자동차에서는 그렇지 않다.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음악을 듣거나 바깥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극장은 더더욱 그렇다. 연극이나 영화를 보면 되고, 그 순간만큼은 함께 하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쉬린>에서 이들은 서로 다른 감정과 상황을 갖고 동일한 극을 보는 여성들이다. 아마도 그 극장 안에 여성만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는 여성의 얼굴만을 그것도 클로즈업해서 잡는다. 얼굴의 조그만 근육의 움직임도 보일만한 거리에서 카메라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익명의 얼굴들을 포착하는데, 이들 사이에는 서로 어떠한 교류나 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쉬린’이라는 여성의 생을 그린 극뿐이다. 서로 다른 표정과 몸짓을 가지고 있던 그녀들은 마침내 극이 클라이막스에 이르자 모두 같은 감정을 느끼고 모두 함께 운다. 서로를 알지 못하는 그녀들의 소통이 시작된다. <사랑을 카피하다>의 제임스와 그녀 역시 자동차 씬을 시작으로 소통이 시작된다. 제임스의 책에 무척이나 감동받은 그녀는 가이드를 자처하며, 제임스의 철학을 더 듣고 싶어한다. 하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간극을 확인할 뿐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어깨에 손을 올려주는 위로 한마디임을 깨닫게 되는데 까지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들의 논쟁은 역할극으로 이어지고, 흉내내기 놀이는 그들을 이어준다. 여정의 끝에는 언제나 소통이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결국 인간 군상들을 병렬적으로 배치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그 자리에 둔다. 그의 영화는 설정된 대사 없이 촬영을 시작하기도하고, 배우들의 느낌과 감정에 따라 상황을 바꾸어나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각자의 삶을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는 그녀들이 곧 나이며, 나의 친구이며, 나의 엄마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4.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사실과 기록 혹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허문다. 다큐멘터리 같아 보이기도하고, 설정한 극 같아 보이기도 하는 모호한 경계를 만들어 냈던 초기 영화들은 이러한 그의 경계 허물기가 비교적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기록영화 같아 보였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은 명백히 연출 영화였다. 반면, 최근 영화들은 이러한 경계를 한 번 더 비틀고 있다. <쉬린>을 보며 우리는 영화 내의 장르적 실험을 넘어서 영화와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줄타기 한다. ‘쉬린’을 보는 그녀들을 보며 우리는 나 자신을 반추한다. ‘난 영화를 볼 때 어떤 자세를 하고 있지?, 어떤 손놀림을 하지?, 눈빛이나 표정은 어떻지?’ ‘저 배우는 너무 과한 연기를 하는거 아닌가?’ ‘아직 영화의 초반이라 그런지 주의가 산만하군.’ ‘어? 저 여성은 쉬린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나? 너무 공감가는 표정인데?’ 우리가 시종일관 그녀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할 수 있는 생각은 무궁무진하다. 영화를 보았던 경험, 슬픈 일을 겪었을 때의 감정, 무언가를 감상할 때의 습관 등을 떠올릴 수도 있다. 때론 영화에서 벗어나 또 다른 생각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영화는 일종의 거울이 되는 것이다. 이런 거울의 역할은 광범위한 의미에서 영화가 삶을 반영하고 반추한다는 추상적인 경구를 물리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이 연장선에 <사랑을 카피하다>가 놓인다.

<사랑을 카피하다>에서는 이례적으로 유명한 배우(줄리엣 비노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이것이 명확히 극영화임을 드러냈다. 따라서 줄리엣이 연기하는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려고 할 때 쯤, 그녀는 제임스라는 작가와 또 다른 극을 연출한다. 이쯤 되면 관객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영화 안에 또 다른 영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인단 말인가. 그는 ‘certified copy’(인증받은 복제품, 쯤으로 해두자)라는 주제를 담아내기 위해 관객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영화 안에서처럼 비단 미술품만이 복제품을 가지고 있겠는가? 진품의 복제품도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데, 삶을 복제한, 사랑을 복제하고 있는 이들의 역할극이아 얼마나 유의미하겠는가? ‘이들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인가? 혹시 이혼한 부부인가? 이 영화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가? 이들의 역할극은 진실인가?’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 몰입할 수록 우리는 제임스와 그녀의 역할극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된다.

현실을 계속 의식할 것을 강조하는 우디앨런의 영화는 조잘거리는 감독 자신의 목소리로 내레이션을 처리하고, 그것도 모자라 불쑥불쑥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관객에게 말을 거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일종의 소격효과인데, 영화와의 ‘거리두기’를 통해 혹은 ‘낯설게 보기’를 통해 예술적 효과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우디앨런과는 다른 방식으로 낯설게 보기를 시도한다. 양 벽이 거울로 이루어진 공간에 서 있을 때 느껴지는 생경함과 비슷한 반영이미지의 낯설음일 것이다.

영화라는 형식이 영화 안에서 자기복제를 한다. 이를 두고 많은 평론가들은 지나친 형식주의로 빠졌다고 평가한다. 영화 안의 영화상영, 영화 안의 역할극은 오히려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의 식상함을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의 존재론을 탐구하게 해 준다. 따라서 그의 영화는 우리의 일상을 반영하고 반추하게 한다. 언제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라고 누군가 반문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방식이 키아로스타미 식의 자기 복제는 아니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5. 감독 자신의 경계를 허문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인 억압된 여성, 가정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성이라는 이란 여성의 상투성을 벗어나 있다. 그의 여성들은 주도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고,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이제 이란이라는 지역에서조차 벗어나, 이탈리아라는 유럽의 중심 도시의 산책자가 되었다. 여전히 투스카나의 자연에 매혹되어 있다. 자연이 말해주는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 삶의 여유를 포기할 수는 없나보다. 아마도 <사랑을 카피하다>의 남자 주인공은 감독 그 자신의 투영인 듯 보인다. 이 여유로운 산책자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copie conforme>이란 제목의 책을 썼고, 이 책에 대한 강연을 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왔다. 꽤 많은 사람이 모여 그에게 호응한다. 미술품에 관한 책을 쓰지만 그는 투박한 말투과 섬세하지 못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

분명 <사랑을 카피하다>는 이전 그의 작품과 여러 가지 지점에서 달라져있다. 우선 줄리엣 비노쉬라는 유명한 배우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그가 상업영화의 자리를 노리는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받을 지도 모른다. 이전보다 많아진 인물과 잦은 장소이동, 무엇보다 최초로 이란을 벗어난 나라에서 찍었다는 점 등이 새로운 감독의 작품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이 영화에서 그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한다. 영화에는 이탈리아어, 불어, 영어가 나오는데, 제임스가 이탈리아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설정이 둘이 역할극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이다. 역할극은 오히려 둘의 숨은 욕망과 바람을 드러내는 진실의 통로가 되는데, 소통 불가능의 조건이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로 기능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무엇보다 관객을 연루시키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들의 역할극을 통해 우리는 둘의 관계에 개입하게 된다. 특히 식당에서 둘이 대화하는 장면, 그녀가 남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변신하고 나타나 대화하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전적으로 그녀에게 공감하게 된다. 바로 <쉬린>에 나왔던 그 클로즈 업 카메라 때문이다. <쉬린>의 그녀들은 명백히 스크린을 향하는 시선이지만, <사랑을 카피하다>의 그녀는 카메라와 눈을 마주친다. 그러면서 자신을 꾸민다. 관객이 스크린이 되고, 스크린은 도리어 관객이 되는 이 상황은 감독의 철학을 잘 보여주는 지점이다. 일상의 작은 것들이 영화의 소재가 되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당신의 이야기가 모두가 울고 웃으며 보는 영화가 되고, 별로 특별하지 않은 누군가의 얼굴이 주목해서 보고 싶은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 말이다. 따라서 <사랑을 카피하다>의 그녀가 거울을 보며 칠하는 립스틱의 붉은 색과 귀걸이의 화려함과 바람에 날리는 치맛자락에 감동하고 설레임을 느끼는 것이다. 삶의 즐거움은 이런 소소한 곳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예술은 그 소소함의 일상성을 가장 위대한 창조물로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