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un-frame

일상을 발견하는 몇 가지 방법

유산균발효중 2011. 8. 31. 01:19

일상을 발견하는 몇 가지 방법

동시대미술이 보여주는 일상성의 담론

 

일상성의 출현

늘 되풀이 되는 매일, 혹은 날마다를 나타내는 '일상'이라는 말은 마치 공기와 같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다.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성은 현대인들이 가장 지겨워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놓칠까봐 전전긍긍해 하는 이상한 물건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르페브르의 말처럼 일상성이라는 말은 동시대의 관람자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자 집착의 대상마저 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너무 일상적이어서 그 속성을 찾기 힘든 이 말로부터 우리는 동시대 미술이 천착하고 있는 일상성의 향연을 확인할 수 있다. 일상성의 등장을 통해 예술은 화이트큐브에 머무는 엘리트들을 위한 시각적 유희에서 벗어나 소수의 특정한 이들의 몫이 아닌 예술을 창조하고 향유할 수 있는 대중을 가능케 했다. 또한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사소하고 평범한 것으로부터 예술의 영감을 발견하도록 했다. '일상성'은 예술이 몇몇 천재적 작가의 것이 아닌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에게까지 유의미한 것이 될 수 있게 해주었다.

과거에는 의미 있는 사유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일상'이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자 예술의 소재가 된 것은 산업사회의 시작과 더불어 인간 존재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게 되면서부터이다. 시각미술에 있어서 '일상성'의 출현은 현대미술의 시작과 맞닿아 있다고 하겠다. 일상을 그 중심에 두는 현대미술은 60년대 미술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급진적인 예술가들은 1930년대부터 다다와 초현실주의 등의 아방가르드운동으로부터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반성과 비판의식을 싹틔워왔다. 이러한 맹아는 바야흐로 60년대를 기점으로 시각예술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60년대는 미술사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정치적인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유럽의 학생운동, 아메리카 대륙의 인종차별반대운동, 제3세계 국가들의 민주화 운동 등이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다.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자본주의가 전 지구화되었고 사회적으로는 대중매체의 발달과 자본의 유입으로 인해 삶의 양식이 크게 변화되었다. 자본이 개인의 삶의 모든 부분에 침투하게 되면서 사적 영역이 중요하게 대두되었고, 동시에 자본으로 인한 인간 소외 현상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정치, 사회적인 변화와 맞물려 추상표현주의 이후 시각예술의 영역에서는 자본주의와 모호한 공모관계를 맺는 팝아트가 떠오르게 된다. 팝아트가 자본에 대하여 갖는 동경과 비판의 이중성이 모호한 공모관계를 이루며,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마치 자본에 대한 현대인들의 이중성과 비슷하게도 말이다.

이런 맥락 하에 일상성을 소재로 한 광범위한 영역의 작업들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일상의 사물을 미술관으로 옮겨온 시초가 된 팝아트와 이에 영향을 받은 작업들, 일상성을 의례와 의식의 차원으로 만들어버린 작업들, 현대인의 일상적 삶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작업들까지 시각예술에서 일상성의 담론이 어떤 지형도를 그리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형태화된 일상성

 

일상성이 예술의 형식적 부분에 전면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한 것은 앞서 살펴보았듯, 팝아트이다. 예술가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평범함에 비범함을 덧입히는 것이 일상성과 관련한 팝아트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팝아트의 작업들은 자본주의화 함께 변화된 삶의 일상적 조건들을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것이 미국미술이다(2011.6.11-9.25)>展을 통해 일상성이 시각예술에서 어떻게 처음 이용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60년대 미국미술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은 소비문화를 통해 대중의 일상이 어떻게 변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예술이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앤디워홀, <브릴로박스>, 1963. 리차드 에스테스, <사탕가게>, 1969.

 

앤디워홀의 <브릴로 박스 (1963)>나 리차드 에스테스의 <사탕가게(1969)>은 소비문화의 단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대량생산된 일상의 사물이 미술관에 어떻게 침투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동시대의 관람자들은 이러한 작품들을 보며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기성품들이 얼마나 그럴듯한 모습으로 미술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즐거워하게 된다. 집에서 늘 사용하는 세제 상자를 보면서 신기해하고, 사탕가게에 놓인 간식거리들과 상표들을 보며 이름을 되뇌며 만족한다. 작가들 스스로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미술관에 놓인 이들의 작품은 자본과 소비사회에 대한 정당화로 읽힌다. 일상의 사물도 미술관에 놓이면 예술일 수 있다는 정당화와 함께 말이다.

팝아트의 작가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상의 사물들을 미술관에 옮겨 놓았는데, 워홀이나 에스테스처럼 실제 사물과 같아보이도록 그려진 작품들이 있는 반면, 클레즈 올덴버그나 로이 리히텐 슈타인과 같이 과장과 변형의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올덴버그는 일상적 사물의 촉감이나 질, 소재를 변화시켜 관람자에게 생경하고 낯선 느낌을 주어 예술적 성취를 획득한다. 리히텐슈타인은 텔레비전의 픽셀로부터 얻은 영감을 자신의 회화에 적용하여 도트(dot)로 이루어진 정물이나 인물을 그린다. 이들은 작품을 통해 일차적으로 일상의 사물을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이를 넘어서서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형식적 변형을 가했다. 이로 인해 관람자들은 일상의 사물을 보는 즐거움에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까지 얻게 된다.

전자의 경우에서 현실과 똑같이 그리든 후자처럼 낯설게 보이도록 만들어내든, 팝아트의 작가들은 현실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오락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여기에는 작가의 인격이나 삶에 대한 반성, 일상에 대한 성찰은 개입되지 않는다. 국내에서도 '코리안 팝아트'라는 이름으로 일군의 작가들이 등장했는데, 일상의 사물에 주목하는 작품들과 전시들은 최근 10년간 매우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주로 일상의 사물들의 사용가치를 말소하고 전시가치를 통해 예술이 주목하고자 하는 대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작업들은 대중문화의 이미지와 대량생산 체계의 사용, 일상의 사물들의 변용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초기의 팝아트와 이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주로 형식적인 실험을 통해 일상성을 드러내는 직설적인 것이었다면, 최근의 전시와 작품들은 보다 성찰적이고 내적인 방식으로 일상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클래스 올덴버그&코샤 반 뷔르겐 로이 리히텐 슈타인, <금붕어 어항>, 1977.

<부드러운 비올라>,2002. <크리스탈 그릇이 있는 정물>, 1973.

 

 

의식화ritual된 일상성

 

시각예술에서 일상성을 다루는 또 다른 방식은 예술가의 삶이나 예술가가 사용했던 일상의 사물을 박제로 만들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주로 거장들에 대한 회고전에서 자주 열린다. 관람자들은 이를 통해 작가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그가 사용했던 도구와 습작을 통해서 소박함과 친근함을 느끼기도 한다. 국제 갤러리에서 열렸던 <구본창展>,(2011.3.24-4.30)의 경우 이러한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구본창이 소장했던 물품이나 작업소품들을 한 층에 빼곡하게 전시하여 그가 일상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이 주는 감동과 매력에 비해 이들은 박제된 동물들처럼 밋밋하기만 하다.

구본창展 전시장 내부의 모습요셉보이스展 제2전시실 모습

거장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한 회고는 소마미술관에서 열린 <요셉보이스: The Multiple展 >,(2011.6.16-8.28)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제1전시실에서는 요셉보이스가 자주 사용했던 소재인 펠트나 지방덩어리를 어떻게 발견하고 영감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화와 그가 그린 드로잉이나 작품 구상 등을 주로 전시하고, 2전시실의 경우에도 그가 입었던 옷이나 작업과정을 보여주는 도구들을 전시했다. 이를 통해 요셉보이스가 사용했던 소재들이 그의 작업과 어떠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구본창이나 요셉보이스의 것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일상의 사물들이 아우라를 지닌 예술가를 통해 새롭게 탄생하는 것을 통해 일상적 사물의 비범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전시는 작품들과의 내적 연관성보다는 의례화된 일상의 사물을 강조함으로서, 대중들에게 공감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초월적이고 제의적인 의미로 탈바꿈된다. 이것이 동시대미술이 보여주는 일상성의 또 다른 방식인 것이다. 동시대미술이 지니는 일상성의 측면이 이처럼 전시가치에만 그치거나 공허한 형식적 유희가 되지 않도록 일상성을 시각예술의 내용적 측면에까지 확장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내면화된 일상성

 

일상의 진정한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의 전시 중 '지금, 여기'의 일상성을 잘 내면화 한 전시로 필자는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시간의 창 Time Window>展,(2011.6.23-8.7)에 주목하고자 한다. 비록 시간과 영상작업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일상성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지만, 이 전시가 내세우는 키워드를 통해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동시대인의 바람 등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이 전시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일상성은 시간에 천착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특정한 사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져 있는 시간의 흐름이자 덧없어 보이는 일상의 시간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은 늘 시간에 쫓기며 살아간다. 이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업들은 바쁜 일상의 시간을 '일시정지'해 볼 것을 권고한다. 시간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일상의 시간을 놓쳐버리지 말 것을 경고하기도 한다. 신기운의 작업들은 시간의 덧없음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자동분쇄기에 기계적으로 갈려나가는 시계를 바라보며 인생의 우울함을 공감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사회생활과 일상은 어느 새 물리적인 시계의 몸체, 인간의 몸을 갉아먹는다. 학생의 풋풋함을 지니고 있던 평범한 한 여성이 아이를 낳고 아줌마가 되어가는 10년의 과정을 담아낸 유지숙의 작업 역시 일상의 시간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강소영릴릴의 작업 역시 변화하는 시간 속에 고요하게 남아있는 풍경을 담아내며, 시간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신기운, <진실에 접근하기-시계>, 2005.유지숙, <10years Self-portrait>, 2010.

 

일상성의 또 다른 키워드는 도시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성의 장소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김세진의 작품은 도시 생활자들의 삶을 보여준다. <야간근로자>(2009)라는 영상작업에서 작가는 야간 경비근무를 하는 남자와 톨게이트에서 요금을 징수하는 여자의 일상을 보여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이들의 밤샘근무를 두 개의 화면에 동시에 보여주며 고독하고 소외된 도시인의 삶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담아낸다. <24시간 도시>에서는 공허한 도시라는 공간을 상징하는 텅 빈 패스트푸드점의 내부를 찍은 사진을 통해 관람자는 도시라는 공간이 주는 공허함과 고독의 일상을 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공허한 도시에서 일상을 보내는 현대인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나 막연한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자신의 삶을 정당화시켜나간다. 오용성의 작업이 보여주는 실험적인 영상은 이러한 현대인의 바람을 형상화시킨다. 파편적인 사진조각이나 풍경을 조악하게 붙여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클래식 No.1978>의 경우처럼)를 그려내거나 미래에 대한 풍경을 상상해내기도 한다. (<미래의 기억>의 경우) 따라서 이들의 작업은 쓸쓸한 도시인의 일상을 잘 그려내어 공감을 자아낸다.

오용석, <클래식 No.1978>, 2009.유현미, <그림이 된 남자>, 2009.

 

내용과 주제의 측면에서 뿐 아니라 이 전시에서 다루고 있는 예술의 형식에 대한 성찰 역시 일상성을 잘 포착해낸다고 할 수 있다. 유현미는 주변에 늘 존재해 온 듯 보이는 평범한 사물을 3차원 공간에 모아놓고 실제 사물에 색을 칠해 2차원 회화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이를 사진이라는 매체로 촬영하여 실재와 환영사이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림이 된 남자>를 바라보는 관람자들은 우리의 일상이 언젠가는 미술관의 그림처럼 생명력 없는 틀에 갇혀버릴 것에 대해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동시대인의 불안을 담아낸 이 작품에서 관객들은 자신의 일상을 반추하게 될 것이다.

 

다시 일상으로.

 

이제까지 살펴보았듯, 동시대미술이 보여주는 일상성의 담론은 미세하지만 분명한 변화를 겪어 왔다. 팝아트의 직접적이고 단순한 사물 보여주기로부터 동시대의 대중들은 예술을 소비하게 되었다. 또한 특정 예술가의 일상 사물을 전시함으로써, 창조성과 예술적 성취에 대한 옹호와 찬양에 일상성이 사용되었다. 이때의 일상성은 오히려 특수하고 천재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일상에 관한, 혹은 일상을 담아내는 시각예술이 해야 할 일은 단순히 관객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담아내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일상성을 덧입힌 작품들을 통해 어떻게 일상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침묵한다면 이는 일상을 박제화하고 의례로 만들어버리며, 일상의 생명력을 말살시켜버린다.

따라서 '일상을 예술이 되게 하라.'는 상황주의자들의 경구나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요셉보이스의 주장을 의미 있게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동시대인들의 일상에 대한 철저하게 현실적인 관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일상의 시공간을 새롭게 바라보고 반성할 수 있는 형식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미술관을 금단의 영역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이루어진 '일상성'에 대한 성찰이 또 다른 성역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