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우뚱 묵상

욥기 10장의 바니타스

유산균발효중 2014. 7. 21. 19:08


라투르의 정물화 @ Louvre


1650-1660년대에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특히 많이 그려진 바니타스(Vanitas)화는 유럽최대의 종교전쟁이었던 30년 전쟁 후의 황폐함, 죽음, 허무, 덧없음을 표현한다. 중세의 시작이 성상화나 성경의 이야기들을 주제로 하여 캔버스를 신에 대한 찬양과 영광으로 채우고 있다면, 중세의 말기는 해골과 초, 세속적인 정물들을 통해 종교에 대한 회의와 인간 육체와 물질에 대한 허무를 캔버스에 빼곡하게 담고있다. 

일상의 사물들을 '보고 관찰하여' 그리는 그림을 정물화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바니타스 정물화는 실제로 테이블에 놓여진 대상에 대한 관찰을 기초로하지 않는다. 누가 집의 따스함을 상징하는 테이블위에 해골과 시계, 책이나 칼 등을 올려놓겠는가? 

따라서 바니타스화는 관찰한 것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그려진 사물'을 관찰하고 생각해보는 그림인 것이다. 불가능한 정물들, 그러나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놓여있는 그 사물들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죽음과 가까이 놓여있는지 말이다. 


라 투르가 그린 막달라 마리아의 회개는 정물만을 그린 일반적인 바니타스화와는 조금 다르다. 다소곳한 여인이 거울을 보고있는 영락없는 인물화같은데, 그 여인이 손을 얹어놓은 곳은 바로 해골이다. 여인의 다소곳함과 해골의 모습이 이룬 조화는 사뭇 그로테스크하다. 라투르는 이 그림의 제목을 참회하는 막달레나라고 지었다. 그녀가 회개하는 근거는 바로 그녀가 손을 올린 그곳, 자신의 유한함에 대한 자각에서 나온다. 



1638-1643 oil on canvas 93 x 133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City


그리고 리히터는 초와 해골이 있는 정물, 혹은 초가 있는 정물들을 즐겨 그렸다. 매우 심플하지만 강렬한 그의 이 작업은 아직 길게 남아있는 촛대와 그럼에도 활활 타고 있는 불꽃이 시간의 흐름을 고요하게, 그러나 결정되어 있는 사건으로 시각화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리히터의 인물화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Gerhard Richter:Schädel mit Kerze (Candle with Skull), 1983 © Collection Böckmann




욥이 20절에서 22절까지 토로하는 이 말, 내가 죽기전에 얼마남지 않은 이 짧은 날을 좀 쉬게 놔 둬 달라는 외침이 오히려 죽음과 연결된 이 고요한 그림을 연상시켰다. 욥은 누구보다 정확하게 '죽음이 자신의 발 앞에 놓여있음'을 의식한 자였다.

"내가 살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를 좀 혼자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게 남은 이 기간만이라도, 내가 잠시라도 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둡고 캄캄한 땅으로 내려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리로 가기전에 잠시 쉬게 해 주십시오. 그 땅은 흑암처럼 캄캄하고, 죽음의 그들이 드리워져서 아무런 질서도 없고, 빛이 있다해도 흑암과 같을 뿐입니다." (새번역)

그리고 죽음앞에 놓인 그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정확하게 의식한 자였다. 살아있음이 오히려 고통인 상황 중에 영혼의 거울을 살피는 저 여인처럼, 고요하지만 진정하게 그분께 드려야할 기도를 읖조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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