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para-screen

Deux jours, une nuit_ par les frères Dardenne

유산균발효중 2014. 5. 24. 08:01



photos@allocine



이 영화가 다르덴 형제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시간과 이 공간에 함께 살아내고 있는 우리에게그들의 한층 정교해지고 현실과 가까워진 문제제기는 유효하고 시의적절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또한 그들을 기다린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으며 한두번쯤은 곱씹으며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다. 덧붙여, 전작들과 연속선상에서 여전히 '함께 살아감'의 문제를 논하고 있으면서도 그 누구의 어떤 선택에 대해서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라고, 여기까지 쓰고나니 나 정말 다르덴 빠인가보다. 헉, 게다가 이번엔 마리옹 코티아르까지 나와버렸다. 알로시네같은 영화 소개 사이트를 보면 그녀의 종횡무진한 이력에 좀 질린다라는 대중의 평들이 없지 않은데, 여전히 그녀의 에너지를 따라잡을 만한 또 다른 프랑스 여배우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신문에 난 인터뷰에 보니, 그녀 자신도 다르덴의 오랜 팬이지만 자기에게 '그들의 영화' 배우로 제의가 온것에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오버하지 않으면서도 벨기에 억양을 익히고자 연습했고, 이제까지 했던 어떤 역할들보다 다이나믹한 역할이었다고 말했다.여긴 잡설)


1. 자본주의의 얼굴

Deux jours, une nuit를 번역하면 1박2일쯤 될 것 같은데, 아마 한국에 상영할 때는 '투데이즈 원나잇'으로 개봉되는 듯하다. 내용은 이렇다. Solwal이라는 작은 중소기업 혹은 공장쯤 되는 회사에 다니는 산드라는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인 여성이다. 16명 남짓한 직원들에게 회사는 1000유로의 보너스를 지급하기로 한다. 다만, 누군가 한명을 해고시키는 조건으로, 그 대상이 바로 산드라이다. 주말을 앞두고 이 소식을 듣게된 산드라는 절망에 빠진다. 그런데 이 해고는 단순히 회사의 직접적인 해고조치가 아니라 직원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될 예정이다. 과반수 이상이 찬성하면 산드라를 해고시키는 걸로. 이보다 더 높아질 수 없는 실업률을 기록하는 유럽 모든 나라들에서 해고 대상이 된다는 것은 가장 위협적인 일이다. 그것도 아이가 둘이나 있는 여성에게. 

그렇다, 이 지점에서 다르덴은 가장 근대사회가 자랑해마지않는 가장'자본주의'스러우며 '민주주의'스러운 상황으로 우리를 밀어넣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놓인 이 무대를 한발짝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사원의 해고를 결정하는 것이 모두의 일이라니 이 얼마나 민주적인가. 또한 한 동료의 노동력을 내 주머니에 들어올 1000유로와 등가교환 할 수 있다니, 이역시도 얼마나 자본주의적인가. 


2. 소시민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의 토/일이라는 이틀, 월요일 아침이면 그녀의 운명은 결정될 것이고, 아마 이미 회사가 내놓은 1000유로에 설득당한 동료들은 지금은 없지만 미래에는 있을 그 돈을 써야할 곳을 빼곡하게 셈하고 있을 테다. 남편 마뉘는 산드라에게 계속 남아있도록 투표해달라고 동료들을 설득해보라고 말한다. 강압적이지 않지만 시종일관 끈질기고, 눈물은 머금고 있지만 조금은 냉정하게 말이다. 당장 그녀가 해고되면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그의 월급으로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며, 불안한 정서를 지닌 그녀를 감당할 재간도 없을테다. 그냥 그는 소시민 가장이니까. 

이리하여 산드라는 과반수의 표를 얻기위해 동료들 한명한명을 찾아간다. 자신을 지지해주는 줄리엣의 도움으로 종이한장에 빼곡하게 적힌 주소지를 찾아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영화 전체에서 거의 똑같은 대사를 열몇번 반복한다. "월요일에 있을 투표건으로 찾아왔어. 이런 말해서 좀 그렇긴한데, 내가 남아있을 수 있게 투표해줄 수 있어? 그래. 니 상황 이해해. 미안해할 거 없어." 류의 대사. 그말을 듣는 산드라의 동료들은 불편하다, 그리고 그 대화를 바라보는 우리도 불편하다. 

그녀를 위해 투표해 줄 수 없는 이유는 이렇다. '사실 우린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이미 장 마크가 결정한 일이야.'/'산드라, 너도 알잖아, 니가 만약 내 입장이라고 해봐. 우린 내년에 대학에 들어가는 아들이 있어. 집을 수리하기 시작했는데 못 끝내고 있어.남편이랑 상의해볼게 사실 그가 반대하거든...'/ '그 투표는 너를 해고시키는 것에 투표하는게 아냐, 단지 내가 보너스를 받을지 결정하는 투표라고.' /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유들 아닌가?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나 악을 선택하는게 아니라고, 단지 내 삶을 더 편리하고 윤택할 수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 뿐이야. 너도 그렇지 않니? 이런 구조에서는 우리같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선택권도 없어. 그냥 맡겨진 일을 하는 것 뿐이야. 진짜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그리고 그들에게 산드라는 매우 용감하고 쿨하게, 나를 동정할 필요없어. 미안해하지도 말고. 이해해. 안녕 월요일에봐. 라고 말하고 홀연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뒤돌아서 진정제와 물을 삼키고 켁켁거린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을 받으며.


3. 연대와 동정 사이에서

이 와중에도 산드라에게 표를 던지고자 '결심'한 이들이 있다. 산드라가 전에 배풀었던 친절을 기억하기 때문이기도하고, 그녀의 딱한 사정에 미안하기도 하고, 그냥 성정이 착하기도 해서이다. 이들은 보너스를 받아야만하는 다른 이들의 전화회유에 시달리고, 배우자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이혼의 위기에까지 처하기도 한다. 이틀동안, 산드라의 피곤하고 지친 여정의 중간 중간에 이들의 지지는 그녀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만든다. 산드라 스스로도 계속 되뇌이는 '이러는거 아무소용 없어.' -아마도 헛된 기대를 갖지 않고자-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나무에서 힘있게 짹짹 거리는 새들을 부러워한다. 이 새의 메타포는 복음서의 어느 장면을 떠올리기 딱 좋은데, 수심가득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먹는 이 부부가 절망적인 대화를 나누는 순간, 마침 그녀의 허무해보이기만 했던 시선이 이 새들에게 옮겨진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권리에 대한 예수의 선언으로 말이다. 




4. 진정한 연대란

이 영화는 굳이 우리를 산드라의 입장으로 데려가기위한 감정과잉장치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다르덴의 특기인데, 우리는 그녀에게 표를 던지기를 반대하는 사람이나 찬성하는 사람 이 둘 모두이다. 그리고 산드라이기도 하고, 그녀의 남편 마뉘이기도하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가 우리에게 매우 단호하게 주장하는 바가 있는데, 연대라는 것은 단순한 감정적 동정이 아님을 잊지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고, 내 주머니에 들어올 혹은 이미 들어와있을 1000유로를 그녀에게 내 놓아야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1000유로를 선택하는 것은 동시에 동료의 해고를 선택하기도 하는 것임을 잊지말라는 것이다. 

당연히 1000유로를 선택하는 것은 악이 아니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이 선택이 포함하고 있는 이면의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한다는 뜻이다. 그 누구도 악을 행하기 위해, 일부러 해를 끼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사이코페스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수많은 부조리와 모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미 이러한 문제제기는 채플린 이후 수많은 시네아스트들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보며, 가장 가깝게는 캔 로치일테다. 캔 로치의 영화는 일견 이러한 위협에 대한 직관적인 감지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 관객을 선동과 계몽으로 몰고가려는 우를 범한다. 가슴은 뜨거워지지만 막상 무엇을 해야할지는 모르는 그런 상태랄까. 나는 다르덴 형제가 이것을 설명하려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우리같은 소시민에게는 멀어보이는 실체없는 사회악과 구조적모순이 사실은 개개인의 선택과 투표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면 너무 비약일까? 


5. 그리하여 산드라는 마침내 과반수 '이상'의 벽을 넘지못한다. 그러나 회사는 그녀에게 또다른 제의를 한다. 곧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일을 그만하게 될, 평가가 좋지못한 어떤 이의 자리에 그녀를 대체하겠다고. 타인이 해고당한 자리에 앉을 수는 없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내내 불행하고 힘들게 억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자 했던 산드라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고당한 지금, 가장 행복하고 해맑은 미소로 이제부터 일을 찾아보겠노라고 말한다. 

연대는 몫이 없는 자들의 대변인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다. 연대는 그와 내가 같은 배안에 있고, 우리가 아직 함께 살 여지가 있음을 서로 확인해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다르덴 형제는 그들의 이상주의적 면모를 여과없이 발휘한다. 누군가에겐 이런 결말이 다소 허무하게 느껴질 지 모른다.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라고. 하지만 또 다른 이들에겐 산드라가 그 회사를 나올때의 희열을 느끼게 해 줄 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로 절망에 빠진 한 인간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연대라는 것이 현실에서 가능할지 말이다. 영화에서 생략한 산드라의 다음을 우리는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도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당장 내일 나에게 찾아 올 이런 선택의 상황에서 내가 고려해야 할 것이 감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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