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도가 소진되었을때 느끼는 어려움이 누군가에겐 불평으로 비치고 누군가에겐 낙심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반드시 노력이기이전에 향유이며 누림이어야한다. 나는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네 믿음의 증거야! 라는 식의 암묵적인 강요는 딱 질색이다. 그리하여 나의 자발성과 타인의 봉사가 동의어가 되는 상황이란 나에게 더이상 선택의 자유가 없음을 뜻한다. 올해 첫 주일예배에서 딱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일이 있었다. 너와 내가 동일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며, 김이 지적한 나의 시니컬함의 이유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곳에서도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며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 그녀를 보내는 파송예배에서 나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주일예배시간에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그녀를 축복하는 눈물도 진정한 중보기도의 눈물도 아니었다. 이런 두 마음을 품은 나에 대한 측은함과, 이런 곳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묵묵하게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그 '있음' 때문이었다. 마치 엘리야가 자신을 죽이러 오는 이세벨을 피해 호렙산까지 당도했을때, 거친 바람도 뜨거운 불도 아닌 세밀한 음성으로 함께 하신 그 하나님의 '있음'말이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걸까요? 하고 물었을때의 바로 그 대답.
3.물론 엘리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한국에서라면 하지 않았을만한 책임을 맡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전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다. 나 말고 아무도 없는 그런 상황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며, [우리끼리만이라도 어떻게 좀 잘 살면되지 뭐]를 극복하는 것이 우리 유학생활의 과업이 될 듯하다. 고되다
4. 물론 우리에겐 이런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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