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수요예배 설교를 들으며 (부끄럽게도)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을 새롭게 묵상하게 되었다.
2. 공관복음에서 모두 다루고 있는 이 인상적인 장면을, Caravaggio는 자신의 주특기인 극렬한 명암의 대비를 통해 표현했다. 카라밧지오가 복음에 대해 얼마만큼의 묵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보여준 빛과 어두움은 구원 이전과 이후 인간이 겪는 내면의 변화를 잘 보여주며 그런 의미에서 마태의 이야기와 너무 잘 어울리는 듯 하다.
3. (마태복음 9:9절)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이 본문의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2: 13절)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누가복음 5:27-28절) 그 뒤에 예수께서 나가셔서,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4. (다음은 설교의 내용) 분명 동일 인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세 본문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두가지로 등장하고 있다. 마태와 레위! 99.9% 레위 지파의 후손이었을 레위는 유대 사회에서 로마식 이름인 '마태'로 창씨개명을 한 것이다. 아마 그의 직업이 세리였던 것을 보니 꽤나 충성스럽게 히브리인들의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바치며 자신의 배를 불리며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민족에겐 매국노인 레위지파의 레위, 그러나 로마에는 충직한 세리의 역할을 했을 마태.
그렇다면 왜 누가와 마가는 레위라는 이름을 썼을까? 아마도 마태는 초대교회에서 엄청난 역할을 하는 사도였을 것이며 매우 존경받는 이였을 것이다. 예우차원에서 창씨개명의 과거를 굳이 언급하지 않았겠지.
그러나 마태는 죄인된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있다. 예수님이 부르셨을때, 자신은 '마태'였음을 인정하고자...
5. 이름. 정체성. 나에 대한 인식.
마태는 이 장면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예수님이 부르셨던 순간. 나는 어둠가운데 있었노라고, 죄인이었노라고 어떠한 포장도 없이 고백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래서 카라바조의 마태도 '얘요? 저요?' 하는 표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예수님을 만난지 몇 십년후에 노사도가 쓴 이 회고를 통해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잠시나마', '또 다시' 맛보게되었다.
1599년에 그린 Calling of St.Matthew (이미지출처는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