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우뚱 묵상

le cri par Edvard Munch, 1893

유산균발효중 2014. 7. 10. 16:56

강렬한 색채와 표현주의적 해석으로 유명한 노르웨이 화가, 뭉크의 1893년 작인 '절규'의 독일어 버전 제목은 우리말로 '자연의 절규'라고 한다. 그림의 뒷편에 걷고 있는 두 행인은 뭉크와 함께 걷던 동행들로, 뭉크는 해질녁 다리를 건너는 순간 하늘이 붉은 핏빛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았고, 이를 자연이 지르는 비명, 자연을 관통하는 비명소리로 들었다. 가던 길을 멈춘 채로 두려움에 떨었던 자신의 기억을 이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이 그림은 불안한 내면심리나 감정상태에 대해 표현하고 싶은 목적이었기보다, 자연이 내지르는 비명, 인간이 다가갈 수 없고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그 영역이 내지르는 결핍에 대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Huile sur toile
91 x 73,5 cm 
Version 1893
Musée national et Munch, Oslo, Norvège

http://www.eternels-eclairs.fr/tableaux-munch.php#munchI







한마디로 뭉뚱그려, 그에게 고난이 찾아왔다고 말해버리면 그만인 것을. 
화자는 너무 자세하게도 그가 귀로 듣고있는 말을 이 짧은 구역에 4번이나 반복한다. 그만 듣고 싶다고!하고 소리를 질러버리고 싶다. 이 연속 카운터펀치를 맞으며 욥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욥의 고백이 정말 예배이지만, 그가 그 절망가운데서 내뱉은 그 한숨섞인 기도 앞에는 절규가 있다. 단 한절로 처리되어 있지만 오늘은 이 부분이 정말 강렬하게 느껴졌다. 4번의 재앙에 대한 소식을 듣는 동안의 욥의 반응을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그 말을 듣고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다. 그 끝-큰 아들집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열명의 자식이 죽었다는 그 소식-인 20절에 와서야 욥의 반응을 알 수 있다. 일어나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다음에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하면서 입을 뗀다. 

20절과 21절 사이의 단절,
이 중간에 욥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얼마동안이나 슬퍼하며 겉옷을 찢었을까? 어떤 모양이었을까? 
어떤 마음의 상태로 '어리석음'의 동일어인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하지 않았을까?  
그게 정말 궁금해지는 아침이다. 

난 아직 궁극의 아노미 상태.
마치 7골을 넣는 독일 앞에 모든 전의를 상실한 브라질 선수들처럼-
그러나 언제든 잃어버릴 여지가 있는 그 모든 것이 온 곳을 천천히 더듬어 가본다. 
욥기 두번째날 며칠째 비오는 아침. 
욥 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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