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20장 전후에 나오는 스펙터클은 반복되는 왕의 악행과 신실한 하나님의 언약이 반복되는 장면으로 읽힌다.
요즘 매일성경 본문에 따라 다시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반하는 이들의 행위를 추동하는 것에 눈이 머문다. 숨겨져 있던 단서를 잡기라도 한 듯, 몇몇 장면을 다시 읽어내려가다 보니, 이런 부분이 눈에 띤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전쟁에서 승리한 정직하게 행했다던 여호사밧. 그의 이야기 말미에 갑자기 쌩뚱맞게 악을 행하던 아하시야에 연합해 큰 상선을 만들어 다시스에 보내고자 했던 것을 서술한다. (20:36) 여호람이 아합의 집과 같이 행한 이유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이다(21:6), 유다 왕 아하시야 역시 오므리의 손녀인 어머니 아달랴가 꾀어 악을 행하게 했다(22:4)
아달랴가 왕자들을 모두 죽이는 와중에,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였던 여호바스앗이 피신시킨 요아스. 그는 성전에 육년동안 숨어있었다. 요아스를 보호하고 마침내 그가 왕이 되었을 때에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준 이는 제사장 여호야다였다. 여호야다는 살아있는 동안, 왕인 요아스에게 성전을 견고하게 하며 항상 번제를 들일 수 있도록 조언했다.
불순종한 혹은 순종한 왕들의 운명은 그들의 선택이 누구와 함께 한 것이냐에 달려있다. 시편 1편의 복있는 사람이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와 함께 자리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어떤 것인지 조금 알 것 같다.
지난 며칠간, 우리에게 들려 온 그럴듯한 제안과 조언들을 되짚어보았다. 다시스로 가기 위한 배를 마련하는 것은 매우 똑똑하고 효율적이며 미래를 잘 준비하는 선택일텐데, 우린 왜 더디게 돌아서 바보같이 가는 걸까 하는 자괴감이 울컥 올라왔다. 요즘 묵상하는 이 일련의 사건을 통해 볼 때, 누구와 어떤 길로 갈 것인가가 얼마나 빠르고 안전하게 갈 것인가 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머리와 마음으로 이해했지만, 여전히 소화는 쉽지 않다.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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