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영화는 세개의 시제로 이루어져있다. 대과거/과거/현재 아니, 케빈 이전의 에바/케빈과 에바/케빈 이후의 에바.
이 영화가 범죄에 대한 사회학적 혹은 심리학적 이유를 묻기를 거부한다는 점은 이 모든 시제가 오롯이 에바의 시점으로만 그려져 있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구스반산트가 엘리펀트를 통해 시도했던 것이기도 하다. 사건의 인과가 아닌 사건 그 자체만을 아름다운 색과 정제된 화면으로 그려 줌으로써.
만약 이런 묻지마 총기난사류의 이야기가 사회학적이고자 한다면 (요즘 각종 언론에서 많이 떠들어대고 있듯이) 케빈의 집은 가난해야 하고, 에바와 플랭클린은 갈등이 있어야 하며, 케빈은 왕따여야 한다. 그러나 여기는 그 어떤 요소도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이 이야기가 심리학적이고자 한다면, 케빈은 자폐아이거나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외부세계로부터 강한 충격을 받아야만 한다.
인간의 삶이, 누군가의 실패와 절망이 그의 행동이나 환경, 상황, 심리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린 램지(곧 그녀의 모든 작품을 찾아봐야만 할.)는 확실히 이유를 묻지 않아도 될 만한 서사적 완결성을 획득한다. 그 서사는 이야기의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의 서사이다. 그녀는 자신이 대과거로부터 시작했던 모든 이미지들을 현재에까지 끌어오며 대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1. 수많은 몸뚱이를 뒤덮고 짓이겨진 토마토의 붉은 색은 에바의 집과 차에 뒤덮힌 빨간 물감이 되고, 식빵 사이에 과도하게 뿌려져 삐져나오는 딸기쨈이 되고, 마트의 한 벽에 강박적으로 쌓인 토마토 수프 캔이 되고, 창가로 스며들어오는 불그스르한 태양빛이 되고.
마침내 너절하게 뒤얽힌 활 맞은 시체들에서 뿜어져나오는 피가 된다.
2.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의 더할 나위없는 새하얀 빛은 궁궐같은 집의 벽이 되고, 이빨로 뚝뚝 잘라낸 새하얀 손톱이 되고, 스크램블에 일부러 섞어 넣은 계란 껍질이 되고, 동생의 눈알을 닮은 리치가 된다.
3. 도시의 소음, 잔디깎는 기계의 소음과 벽을 긁어내는 기계의 소음과 앰뷸런스의 다급한 소리의 큰 울림 사이로 들리는 '툭'하고 과녁을 맞히는 활시위 소리의 고요함.
순간순간 어울리지 않는 엄마와 아들, 행복한 가정에 관한 가사를 담은 올드팝.
이 모든 것을 죽음의 은유로 교묘하게 얽히고 섥히게 교차시키며 불안과 긴장을 유지한다.
4. 마침내, 에바를 뒤덮은 붉은 것이 벗겨질 때 쯤, 케빈과 에바의 거리는 조금 더 가까워진다.
덧. 서른살 생일에 시네큐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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