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시울, 2006)
일상생활의 혁명 | 원제 Traite de savoir-vivre a l'usage des jeunes generations
라울 바네겜 (지은이), 주형일 (옮긴이) | 이후(시울)
출간일 : 2006-10-12 | ISBN(13) : 9788992325011
권태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상황주의자' 바네겜의 주저이자, 1967년 처음 출간된 이래 68년 혁명 세대의 바이블로 여겨지던 책.
제 2판 서문을 통해 저자는 책의 의미와 본질을 이렇게 말한다. "1968년에 생존을 산 채로 해부한 이 불법 작품은 갑자기 사람들의 감수성의 벽을 뛰어 넘었다." 라울 바네겜은 이제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바네겜은 당시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표현했다. "굶어 죽을 가능성이 있는 세계일지언정, 권태로 죽을 가능성이 있는 세계와는 바꾸지 않을 것이다." 저자에게 권태는 소외, 더 정확히 말하면 죽음, 질병, 고통 같은 자연적 소외가 아니라 모욕, 고립, 외양에 대한 굴복 등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소외가 체계적으로 낳은 산물이다.
그런데 이 사회적 소외가 가장 첨예해진 곳, 그래서 권태가 사람들의 영혼을 잠식할 만큼 만연한 곳을 저자는 연대세계의 일상생활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소외를 주관하는가? 그것은 소비자본주의의 권력자들이다. 저자가 말하는 '일상생활'의 혁명'은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는 정언 명령이다.
라울 바네겜 (Raoul Vaneigem) - 프랑스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드보르(Guy Debord, 1931~1994)와 함께 "20세기 최후의 아방가르드"로 불리는 상황주의인터내셔널을 이끈 핵심 이론가이다. 벨기에 에노 주(州)의 레신느에서 태어난 바네겜은 1952~56년 브뤼셀자유대학에서 로망스어 문헌학을 공부한 뒤 1961년 상황주의인터내셔널에 가입한다. 1970년 상황주의인터내셔널을 탈퇴하기까지 10여년 간, 바네겜은 수많은 논문과 팸플릿을 통해 정치체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변혁하는 것이 진정한 혁명이라는 상황주의자들의 구호를 체계화하는 데 공헌했다.
특히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와 같은 해(1967년)에 출간된 <일상생활의 혁명>은 이듬해인 1968년 프랑스 전역을 뒤흔들며 전세계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68년혁명의 숨은 원동력이었다. <스펙터클의 사회>가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스펙터클에 관한 정치적, 이론적 분석이라면, <일상생활의 혁명>은 이런 스펙터클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급진적 주체성에 관한 철학적, 실천적 사색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학생들은 이 책의 몇몇 구절들을 점거된 학교 담벼락에 쓰는 것으로 자신들의 지침서가 된 <일상생활의 혁명>과 그 지은이 바네겜에게 경의를 표했다.
1970년 11월 14일, "더이상 상황주의운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한다며 상황주의인터내셔널을 탈퇴한 바네겜은 그 뒤로도 <즐거움의 책>(1979), <자유영혼의 운동>(1986), <당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죽음과 그 죽음에서 벗어날 기회에 대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고함>(1990), <인류의 권리선언문: 인권의 지양으로서의 삶의 주권>(2000), <시장사회의 철폐를 위하여, 살아 있는 사회를 위하여>(2002) 등을 발표하며 시장과 임금체계의 논리를 거부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욕망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정치학, 자유롭고도 자기규율적인 사회질서 등을 구상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컬처뉴스(07. 03. 26)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
예술과 정치의 관계, 혹은 정치의 예술화(그도 아니면 예술의 정치화)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지만, 흔히 언급되지 않는 인물들이 있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은 오늘날 국내에서도 전설이 된 프랑스 68년혁명의 ‘숨은 원동력’으로 평가받지만, 이들 중 국내에 소개된 인물은 기 드보르(1931~1994),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라울 바네겜(1934~ )밖에 없다. 이는 다른 식으로 말하면, 아직 국내에서 국제상황주의자들은 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프랑스 68년혁명이 혁명 개념에 가져온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아직 폭넓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침 내년은 68년혁명의 40주기가 되는 해이다. 그런데 내년 5월에도 내게 이런 글을 쓸 기회가 생길지 알 수 없기에 미리 몇 자 적을 요량이다. 따라서 이 글은 68년혁명 40주기를 기념하는 때 이른 축사이기도 하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은 ‘20세기 최후의 아방가르드’이다. 1909년 2월 20일 이탈리아의 시인 필립포 마리네티가 「미래주의 창립선언」을 발표하며 화려하게 막을 연 20세기의 아방가르드운동은 국제상황주의자들이 해산을 발표한 1972년 3월 23일 공식적으로 끝난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주요 특징은 삶과 예술의 통합을 주장했다는 데 있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의 구호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선배들의 주장을 “삶이 예술작품이 되게 하라!”라는 구호로 되받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구호가 똑같다고 해서 그 함의까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국제상황주의자들의 주장을 다시 경청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만 들라면 바로 이 점, 그 ‘다른 함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의 구호가 다른 함의를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활동하던 시대 자체가 예전과 달랐기 때문이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활동했다. 스펙터클의 사회란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이는 것’(une chose vue/a thing seen), 즉 우리가 능동적으로 보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보여지는 어떤 외양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오해를 무릅쓰고 더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구경꾼이 되는 사회이다.
바네겜에 따르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인간은 삶을 볼지언정 살지는 않는다. 혹은 완전무결한 그 무엇인양 제시되는 ‘보여지는 것’(예컨대 ‘좋은 삶의 표본’)을 모방하면서 살 뿐이다. 또한 이처럼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 단순히 따라야 할 그 무엇으로 제시되는 것을 넘어 소비되는 상품(소비재)이 된다는 점에서 스펙터클의 사회는 소비사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제시된 삶을 소비하지 우리의 삶을 살지 않는다. 또한 이렇듯 적극성이 제거된 삶은 권태로울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스펙터클의 사회는 ‘권태로움의 사회’이기도 하다. 『일생생활의 혁명』(도서출판 시울, 2006)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고 제안하는 책이다.(이 책의 원제 자체가 “젊은 세대를 위한 삶의 지침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인가? 바네겜은 구경꾼이기를 그치고 참여자가 되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시의 예술가’가 되라고 권유한다. 이때 바네겜이 말하는 시(posie)는 어원 그대로의 시이다. 즉, 시작품(pome) 또는 시작품을 쓰는 기술이 아니라 ‘만들다’(poiein)라는 그리스어 동사에서 파생된 ‘만드는 기술[포이에티케]’(poitik)이다. 따라서 시의 예술가가 되라는 바네겜의 말은 ‘만들어내는 사람[포이에테스]’(poits)이 되라는 말과 같다. 자신의 삶을 직접 만드는 예술가.
바네겜이 그냥 예술가가 아니라 시의 예술가가 되라고 말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네겜에 따르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는 예술조차 소비재로 축소된다. 그래서 “불행히도 예술가는 스스로를 창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관객들 앞에서 자세를 잡고 볼거리를 제공한다.” 결국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볼거리로 만든 예술작품을 관조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 옛 창조자에게 돌멩이를 던지게 됐다는 것이 바네겜의 진단이다. 그러나 누굴 탓할 것인가? “이 태도는 예술가가 유발한 것이다.”
따라서 바네겜은 “이제 더 이상 예술가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모두가 예술가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전적 의미에서의 예술작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열정적으로 삶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예술작품이 될 것이며, “사람들이 만드는 현실과 사건 속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매우 잘 된 일이다.”
얼핏 보면 이런 바네겜(그리고 국제상황주의자들)의 주장은 삶과 예술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그 이전의 역사적 아방가르드들이 제시했던 주장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 함의는 상당히 다르다. 이 점을 살펴보려면 다시 포이에티케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포이에티케는 미메시스를 전제로 한다. 즉, 흔히 ‘모방’으로 번역되는 미메시스를 통해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 미메시스할 것인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미메시스란 무엇인가에 있다.
첫 번째로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실제 예술작품을 미메시스하는 방법이 있다. 낭만주의에서 유미주의에 이르는 전통에 발 딛고 있는 아방가르드, 특히 “사람은 스스로 예술작품이 되든지 예술작품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의 오스카 와일드가 이런 방법을 택했다. 즉,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예술작품처럼 자신을 만드는 것, 막말로 하면 폼 나게 사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비루한 현세의 삶을 초월한 가상의 이상화된 존재를 미메시스하는 방법이 있다. 예컨대 히틀러를 곧 도래할 ‘민족으로서의 존재’(un être-peuple), 풍전등화에 처한 유럽 문명 앞에서 비극적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영웅’, 새로운 장래를 약속하는 ‘지도자’와 동일시해 이 총통을 미메시스한 나치가 이런 방법을 택했다. ‘도래할 인민(민중)’을 말하는 구 사회주의권식 예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삶의 심미화’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두 가지 방법 역시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이 심미화하려고 하는 삶의 지향 자체가 기존의 질서(전자의 경우는 부르주아 문화, 후자의 경우는 기존의 강대국에 종속된 후발 산업국가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바네겜이 제시하는 방법은 이와 다르다. 그가 미메시스하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초월적 타자가 아니라 현실의 타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과 다를 바 없이 피와 살을 가진 인간 동료이다. 그는 자신의 인간 동료를 미메시스함으로써 나 아닌 타자와 진정한 소통을 나누고,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안의 타자, 즉 지금과는 다르게 살 수 있는 또 다른 나의 잠재성을 발현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자신의 현존을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바네겜의 말은 바로 이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네겜이 말하는 미메시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모방’이 아니라 프랑스의 철학자 필립 라쿠-라바르트가 말하는 미메시스와 비슷하다. 라쿠-라바르트의 미메시스는 이미 주어진 어떤 이상적 주체를 모방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타자를 모방함으로써 기존에 ‘자기’ 혹은 ‘나’라고 간주되었던 것들을 자기 안에서 제거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기 안의 타자(고유성)를 끄집어내는 기술이다. 즉, 이는 타자에게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타자와 자기 자신을 모두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바네겜이 기존 질서를 전복하려는 “급진적 주체성은 재발견된 동일성의 공동전선”이라는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이렇게 보면 68년혁명의 적자로 흔히 여성운동과 동성애운동이 꼽히는 것도 당연하다).
과연 우리는 바네겜의 말처럼 타인과 진정한 소통을 나눌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각자의 잠재성을 끄집어내고, 기존의 삶을 바꿀 동력을 얻을 수 있을까? 바네겜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권력의 억압에 맞서 기존의 삶을 바꾸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자기실현의 원천, 즉 “창조의 열정, 사랑의 열정 그리고 유희의 열정”은 “자기 양육의 욕구, 자기 보호의 욕구”와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 가지 원천은 모든 존재에 내재해 있다. 그도 아니라면 그것 없이 존재는 더 이상 존재이기를 그친다. 따라서 문제는 다시 실천, 아니 바네겜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인-되기’이다. 안타깝게도 이 요구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일상생활의 혁명』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바로 이런 각성이다.(이재원 _ 그린비 편집장)
07. 03. 26.
P.S. 우리에게 예술가가 되기를 강권한다는 점에서 바네겜과 같은 편에 서는 사상가는 '프랑스의 니체주의자' 미셸 푸코이다. 그 또한 우리의 삶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 것을 권유했다. 내가 읽은 바로는 앨런 메길의 <극단의 예언자들>(새물결, 1996)이 유익한 안내서이다. 니체의 삶-예술론에 대해서는 네하마스의 <니체: 문학으로서의 삶>(책세상, 1994)이 유명하다. 오래전 책이지만 아직 절판되지 않았군...
[서평] 생존의 감옥을 깨고 삶의 창조성을 회복하기
조정환
생존의 감옥을 깨고 삶의 창조성을 회복하기
조정환
『스펙터클의 사회』(기 드보르)와 함께 읽혔어야 할 한 권의 책이 있다면 바로 이 책, 『일상생활의 혁명』(시울, 2006)이다. 라울 바네겜의 이 책은 ‘스펙터클의 사회’ 속에서 주체성의 자리, 혁명의 가능성, 그것의 진로를 다룬다. 『스펙터클의 사회』는 ‘현대적 생산조건들이 지배하는 모든 사회들에서 삶 전체는 스펙터클의 방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는 명제를 통해 『자본론』의 첫 문장을 변주한다. 반면 『일상생활의 혁명』은 ‘우리가 얻을 것은 즐거움의 세계요, 우리가 잃을 것은 권태뿐이다’라는 선언을 통해 「공산당 선언」의 끝 문장을 변주한다. 드보르는, 거대 미디어들이 노동자들을 구경꾼으로 전락시키는 사회에서 혁명적 상황의 창조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물었다. 바네겜은 현대 복지국가가 제시하는 권태로운 생존(subsistance)의 상황 속에서 열정적 삶(vie)의 상황은 어떻게 창조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생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수동적 삶 혹은 삶의 수동성이다. 노동과 여가 모두가 자본에 포섭되어, 삶 전체가 자본의 생산성을 향해 복무하는 사회에서의 삶이다. 활짝 열려 있으나 도망칠 수는 없는 감옥으로 된 사회에서의 삶이다. 바네겜은 이 시시한 삶의 역사적 위치를 냉정하게 평가한다. 생존은 봉건사회의 지배자들의 비정한 살인보다, 부르주아적 착취자들의 체계적 학살수용소보다 더 잔인하다. “사이버네틱스 학자들의 기술적 조직이 가까운 미래의 사회를 향해 내미는 일반화된 조건화의 얼어붙은 손을 아우슈비츠의 학살과 비교한다면 아우슈비츠의 학살은 차라리 서정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우리에게는 이미 ‘가까운 미래’가 아니라 오래된 현재가 아닌가? 그것은 푸코가 삶권력으로, 들뢰즈가 통제사회로, 네그리가 제국으로 명명한 바로 그 사회가 아닌가? 물론 바네겜은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의 이행기를 사유하고 있다. 여기서 삶은 경제적 명령과 소비재로 축소된다. 격한 감정을 피하고 긴장을 피하고 적게 먹고 적당히 마시라는 식의 사적 건강법에 의해 지배되는 생존. 이 생존 속에서 인간은 쾌락과 공포의 미로를 방황하며 영원한 자기상실에 빠진다. 무기력이라는 가장 확실한 죽음에 사로잡힌 삶.
바네겜의 관심은 생존의 상황을 강조함으로써 당대에 이미 널리 유포되어 있는 절망의 분위기와 영합하는 것에 있지 않다. 정반대로 그는 절망을 혁명가들이 앓고 있는 질병으로 이해한다. 절망은 생존적 삶과 함께 거부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거부는 나약한 거부(개량주의)에 머물러도 안 되고 과도한 거부(허무주의)로 기울어도 곤란하다. 그것은 총체적 초월을 향한 거부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관점의 전복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바네겜은 자신의 책을 바로 이 관점 전복의 지침서로 제시한다.
우리는 이 책이 복지국가 시대의 유럽에서 그것에 대항하여 씌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일부의 좌파들이 보존하거나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제시하고 있는 그 복지국가에서의 삶이 바네겜에게는 극복해야 할 문제로서 나타난다. 바네겜의 적은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생존의 삶을 강제하는 사회주의도 포함한다. 그렇다면 이것들을 전복할 힘은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이 책의 20절의 제목이기도 한 ‘창조성, 자발성, 그리고 시’가 그 답이다. 바네겜에게서 자발성은 개인적 창조성의 존재양식이다. 이 창조적 자발성은 외부에서 주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바네겜은 ‘아무리 소외됐다 하더라도 창조성의 부분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한다. 시는 창조적 자발성의 조직이며 그것을 내적 일관성에 따라 개발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속의 의지를 분해하면서 급진적 주체성에 따라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를 가능케 하는 힘이다. 우리는 이런 주장을 하는 바네겜에 대해 ‘아, 예술지상주의자였군!’하고 쉽게 고개를 돌리는 우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에게서 시는 작품으로서의 시 이전의 것이다. 그에게서 시의 본령은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는 시적 행위에 있지 창조된 시작품에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시작품을 만들면서 그것을 폐지하는’ 어려운 과제를 제기한다. 그가 말하는 시는 생존을 넘어 열정의 삶을 창조하는 행위, 즉 ‘새로운 삶의 양식의 추구’ 그 자체이다. 기존의 삶의 조건들, 기존의 예술 자원들을 창조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전혀 다른 질을 창출하는 전용(détournement)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유력한 방법으로 제안된다.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사이버네틱스 사회로의 이행을 날카롭게 포착하며 열정적 삶을 권태로운 생존으로 포섭하여 관리하는 현대 삶권력(biopower)의 작동양식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삶권력의 상황에서 혁명의 낡은 무기들이 더 이상 적합하지 않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자발성, 창조성, 시’라는 바네겜의 혁명적 요구들에 응답이라도 하려는 듯, 책이 출간된 바로 다음해에 68혁명이 폭발했다. 그러나 바네겜과 국제상황주의자들이 기대했던 노동자평의회의 시대는 도래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자본이 바네겜과 혁명이 요구했던 ‘새로운 삶의 양식의 창출’을 축적의 방법으로 ‘전용’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상품을 생산하기보다 삶의 새로운 양식을 생산하며 이로써 삶을 권력 속에 포획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제사회로 나타난다. 바네겜의 무기들이 다시 급진적으로 비판되고 혁명되어야 할 시간이다.
▒▒The Autonomy Review
'예술의 상상 > beyond-le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율평론 33호[시류비판]_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에 대한 비판 (1) | 2010.10.13 |
---|---|
[설계자들] (0) | 2010.10.05 |
[로쟈의 저공비행]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 (0) | 2010.08.13 |
우리, 왜 불편해야 하지? (0) | 2010.08.11 |
[빛의 제국] 자본주의적 권태가 덮은 그의 삶 (0) | 2010.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