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beyond-letter

자율평론 33호[시류비판]_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에 대한 비판

유산균발효중 2010. 10. 13. 16:22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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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게재를 허락해주신 최원 님께 감사 드립니다.
글의 원문은 http://marxpino.tistory.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최원 님의 비판 글은 앞으로 계속 연재될 계획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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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블로그에 '정의론 비판'이라는 제목 하에 (부정기적이지만) 연재 형식을 빌어 글을 올려볼까 합니다. 원래 블로그 활동을 당분간 중단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반드시 생산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또 최근에 (텍스트큐브가 문을 닫는다고 해서) 새로 옮긴 이곳 티스토리의 블로그가 옛글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좀 사적인 이유이고, 보다 공적인 이유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요즘 한국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폭발적으로 읽히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여기에 대한 다소 깊은 우려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래도 '자기계발서' 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이거나, 심지어 '독자들의 승리'라고 치켜 세우는 경우까지 있던데, 과연 사태를 그렇게 낙관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프레시안'에 보니, MB, 박근혜, 정몽준도 함께 이 책을 읽거나 관심을 내보이고 있다는 기사가 올라와 있더군요. 이 책은 알다시피 나름대로 비판적 미디어의 역할을 자부하는 '프레시안'에 의해서도 상당히 열심히 선전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얼마전 서동진 교수와 논쟁한 장은주 교수가 말하는 '진보적 애국주의'라는 것도 결국 샌델의 노선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그야말로 대한민국이 좌우할 것 없이 모두 하나의 '공동체'로 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어 조금 당혹감이 들 지경입니다. 세상에는 심각한 갈등들이 여전히 만연한데, 웬 공동체주의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일까요?

역시 가용한 시간이 많지는 않기 때문에, 부정기적으로 아주 짧은 글을 써서 올리는 식이 될 것 같습니다. 출발점은 물론 샌델에 대한 비판이 될테지만, 점점 '정의론' 또는 '정의' 그 자체에 대한 '내재적 비판'의 관점으로까지 나아가볼까 생각중입니다. 우선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드는 우려로부터 시작해 볼까요?

전 미국 아리조나에서 철학전공으로 유학을 하고 있는 처지인데, 얼마전 부모님이 한국에서 오셔서 며칠 동안 남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샌 디에고에 다녀왔습니다. 네 살박이 제 딸 아이에게 바다구경도 시켜주고 싶고, 아리조나 사막의 뙤약볕 밑에서 부모님과 할 수 있는 일도 딱히 없고 해서 잠시 다녀오자고 간 것이지요. 차를 몰고 가면 6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라 여행에 별 무리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오는 길에 덜커덕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마(Yuma) 근처에서 그만 국경정찰대(border patrol)의 검문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유마는 캘리포니아와 아리조나의 경계에 있는 도시인데, 예전에는 유명한 형무소가 있었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지도를 확인해 보고 알았지만 멕시코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더군요. 그래서 아마 미국-멕시코 간 경계, 일명 "죽음의 장벽"을 넘어 미국으로 들어오는 이른바 불법 이주자들의 이동이 빈번히 일어나고, 이들을 잡기 위해 국경정찰대가 일상적으로 검문검색을 벌이는 모양이었습니다.

문제는 와이프와 제가 여권을 비롯한 이주 관련 증빙 서류들을 지참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내에서 돌아다니면서 이제껏 유일하게 요구되는 신분증은 운전면허증이었기 때문에 별 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멕시코와의 국경 지대에 가면 문제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지요. 우리를 검문한 정찰대원은 우리가 강제송환될 수 있으며 3000불에 달하는 벌금을 물을 수 있다고 하면서 우리를 위협해대다가, 잠시 후에 옆에 쳐 놓은 텐트 밑으로 들어가 차를 대놓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백인들이 탄 다른 몇몇 차들이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 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보니, 몇 분 지나 다른 정찰대원 한 사람이 와서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하더군요. 우리의 운전면허증을 요구해서 넘겨 줬고, 조금 있다가 "왜 여기 서있냐"고 자꾸 묻던 아이가 급기야 울기 시작했고, 아버님과 어머님은 뒷자리에서 괜찮을 거라고 거듭 말씀하시면서도 내심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점점 더 우리는 초긴장 상태로 접어들었지요.

20분 가량 지난 후에 면허증을 가져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신분이 확인되었으니 다시 가던 길을 가도 좋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제부터는 반드시 이주 관련 서류를 가지고 다닐 것을 따끔하게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지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상당히 겁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이번 8월에 (박사논문만을 남겨놓고 있는) 제 학생비자는 만료됩니다. 비자는 원래 입국시에 필요한 서류일 따름이라, 그것이 만료되더라도 I-20라는 서류만 제대로 가지고 있다면 체류하는 데에 원칙적으로는 하자가 없지요. 그러나 국경정찰대나 관료들은 이 점을 자의적으로 문제삼을 수 있습니다. 만일 이번 일이 제 비자가 이미 만료된 상태에서 일어났다면, 아마도 문제는 훨씬 심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장거리 여행은 당분간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여행을 자제하는 것만으로 괜찮을 수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아리조나에서는 지금 (연방정부 관할 국경정찰대가 아닌) 일반 경찰들이 행인들에게 일상적으로 이주 관련 증빙서류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주지사에 의해 서명, 통과되었습니다. 연방정부와의 법정소송으로 인해서 몇몇 논란이 되는 주요 조항의 발효가 지연되고 있지만, 만일 이 법이 완전히 발효되고나면 많은 불법 이주자들은 이동과 행동에 심각한 제약을 받을 것이며, 합법적 이주자뿐만 아니라 많은 비-백인 인구들도 경찰의 항상적 감시 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우스운 것은 사실 US 시민권을 소지한 라틴계 주민의 경우도 그들에게 이주관련 서류가 있을 턱이 없기 때문에, 운전면허증만 가지고 다니다가 경찰의 검문검색에 걸려 곤란을 겪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민법 개악에 반대하는 아리조나 내의 많은 라틴 계열 사람들과 거기에 찬성하는 사람들(주로 백인들) 사이에 긴장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이 법이 대법원에서 무효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예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었던 이러한 법 개악의 시도가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주자들 및 비백인 인구에 대한 인종차별의 높아진 수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라틴(히스패닉) 계 인구는 현재 흑인 인구를 능가할 정도로 그 수가 많기 때문에 종전에는 정치인들이 이들의 표를 잃을 것을 각오하면서 이와 같은 이민법 개악 시도를 할 수 없었지만, 이주자들에 반대하는 여론 지형이 점점 강화됨에 따라 그러한 개악을 시도하면서도 정치인들이 오히려 자신의 표를 더 증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 것입니다. 실제로 여론을 보면 아리조나 내에서는 법개악에 찬성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고, 전국적 차원에서도 찬반이 팽팽하게 맞서 있지만 여론전에서 반대파가 찬성파에게 다소 밀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날로 심화되어가고 있는 경제위기와 실업문제를 고려할 때 앞으로의 싸움 전망도 그리 밝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요.

아리조나주의 현재 상원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오바마와 경쟁했던 공화당의 맥케인인데, 이 사람은 몇년 전까지만 해도 멕시코와의 경계에 철벽을 건설하는 데에 반대했지만(사실 공화당은 이들의 배후에 있는 자본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이민법에 있어서만큼은 전통적으로 민주당보다 더 "진보적"이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고 말하면서 철벽 건설을 역설하고 나왔지요. 요즘 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TV에 심심찮게 등장해서 국경철벽을 완성하겠다고 공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몇몇 다른 이유를 들고 있지만 진짜 변한 상황이란 사실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위와 같은 여론지형의 변화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다소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현재 어떤 이데올로기적 지형에서 제출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샌델은 알다시피 '공동체주의자'인데, 공동체주의는 (거의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듯이) 공동체의 경계를 강화하는 데에 동원될 만한 그런 이데올로기이며, 실제로 이 책 끝에 가서 샌델은 그런 식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9강, 특히 322쪽 이하를 보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주장은 민족국가가 나름대로 모종의 진보성을 띠었던 '그 좋았던 옛날'에는 문제가 상대적으로 덜 심각할 수 있었지만, 민족국가가 더 이상 어떠한 진보성도 담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현재에는 사정이 사뭇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종전과 같은) 모종의 보편성을 담지하지 못하며, 점점 더 특수한 것, 특수주의적이기만 한 것으로 변해가고 있는 중이지요.

이렇게 공동체주의가 현재 '정의'를 논할 수 있는 프레임으로 부적절하다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이 보여주는, 고대 그리스 정치철학으로부터의 후퇴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아마 충분할 것입니다. 사실 샌델의 정의론은 심지어 기존의 공동체주의(예컨대 앨러스데어 맥킨타이어의 그것)로부터도 상당히 후퇴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 그런지는 나중에 다시 설명하기로 하죠. 샌델은 근대 이전의 그리스적 정의관으로 돌아갈 필요를 주장하지만 (그리스적 정의관은 문제가 없는가 하는 질문은 차치하고) 그의 정의론이 그리스적 정의관에 충실한 것인지부터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샌델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해 있는 어떤 크고 작은 공동체(가족적 공동체, 지역적 공동체로부터 시작해서 국가적 공동체에 이르기까지)를 다른 공동체들에 대해 우선시하는 태도는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것이며 오히려 이러한 태도를 부도덕한 것으로 비난하게 되면 도덕적 판단을 행함에 있어 많은 딜레마에 빠진다는 주장을 하지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의해 비로소 세계 안에서의 자신의 자리 또는 샌델이 '목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찾을 수 있게 되고, 그 목적에 걸맞는 '미덕'(virtue)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올바른가를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적 정의관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설명은 그리스적 정의관을 상당히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다음 번에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과연 샌델은 그리스적 정의관에 충실한가?

 

우리는 지난 번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공동체주의적 정의관의 요점이 자기가 속한 크고 작은 공동체(가족, 지역, 국가 등)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데에 놓여있다는 점을 살펴봤습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생각하고, 그 안에서 자기가 어떤 위치와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지 질문함으로써 적절한 미덕(virtues)을 발견할 수 있고, 또 그 미덕을 기반으로 해서 올바른 '사회정의'가 무엇인지 규정해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샌델의 정의관이 사실 고대 그리스 정치철학의 정의관에 충실한 것이기는 커녕, 거기에 한참 못미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러한가를 오늘 간단히 논해볼까 합니다.

샌델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준거해서 위와 같은 주장을 펼칩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은 플라톤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 합니다. 플라톤이 정의론을 전개한 것은 바로 그 유명한 {국가론}에서였는데, 플라톤은 {국가론} 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벌인 두 가지 논쟁을 우리에게 들려줌으로써 논의를 시작하지요. 하나는 폴레마르쿠스와의 논쟁이고, 다른 하나는 트라시마쿠스와의 논쟁입니다. 두 논쟁 모두 아주 중요한 논쟁인데, 오늘은 주로 첫 번째 논쟁, 곧 폴레마르쿠스와의 논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원래 이 논쟁의 발단은 폴레마르쿠스의 아버지인 케팔로스가 한 말에 있었습니다. 늙은 케팔로스는 '나이 들어서 겪는 괴로움'에 대해 좀 들려달라고 소크라테스가 청하자 이런 저런 답변을 하다가 대충 이런 요지의 말을 합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겁도 많아 지는 법이다. 특히 과거에 부정의한 일을 한 적이 있다면 나중에 죽어서 거기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을 두려워하게 되므로 더욱 그렇다. 하지만 보통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는 달리 곤궁을 피하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거나 도둑질을 하도록 강제되지 않기 때문에, 죽은 다음에 벌받을 걱정을 피할 수 있게 되니, 늙어서 마음 고생하지 않는 삶을 사는 데에는 역시 물질적 풍요가 나름 중요한 것 같다. 자기는 이러한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이 말을 다 들은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에게 다짜고짜 질문을 던지지요. '그렇다면 어르신 생각에 정의란 다른 사람에게서 빌린 것을 반드시 갚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말하자면 케팔로스는 부정의하게 획득한 것이 있다면 대가를 치러서 갚는 것이 정의라고 말했던 셈이고,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정말 그런 식으로 규정될 수 있는지를 따져 물은 것이지요.

소크라테스는 먼저 다음과 같은 반례를 들어서 그러한 주장의 모순을 드러냅니다. '만일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정신이 멀쩡할 때에 어르신에게 어떤 무기를 맡겼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친구가 돌아와서 자기 무기를 돌려달라고 하는데, 가만보니 그는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어요. 무기를 돌려준다면 그 친구가 스스로를 해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던 거죠. 과연 이럴 때에도 그 무기를 그 친구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로운 일일까요?'

케팔로스가 소크라테스의 문제제기를 듣고 당황해서 자기 주장을 접고 양보해주려고 하는 순간, 케팔로스의 아들인 폴레마르쿠스가 갑자기 뛰어들어 논쟁을 가로채지요. 아버지 케팔로스는 제사 지낼 일이 있다고 하면서 슬쩍 자리를 뜨고요. 논쟁에 나선 폴레마르쿠스는 우선 정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각자에게 빚진 것을 되돌려주는 것이 바로 정의다(it is justice to give each what is owed).' 그리고나서 폴레마르쿠스는 소크라테스가 반박을 위해 던진 문제제기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해결된다고 주장합니다. 곧 '친구에게는 이로움을 빚지고 있으며, 적에게는 해로움을 빚지고 있다.' 바꿔 말해서, 그 정신 나간 친구에게 무기를 돌려주면 안되는 것은, 그렇게 하면 친구에게 '해로움'을 돌려주는 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해로움은 적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이지 친구에게 돌려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논리지요? 하지만 이미 눈치 빠르신 분은 여기서 폴레마르쿠스가 정의를 기본적으로 친구와 적의 구분을 따라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갚음'의 논리, 그 말을 한 번 더 비틀면, 엉떤 '앙갚음'의 논리에 따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친구에게는 은혜를 갚고, 적에게는 원한을 갚는 것이 바로 정의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쿠스 사이에 논쟁이 계속 이어지는데, 그걸 다 여기서 정리할 수는 없으니 나중에 시간이 있으실 때 한 번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결국 논쟁은 정의를 이로움과 해로움을 통해서 과연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데로 이어지고, 소크라테스는 동일한 하나의 행위나 기술이 폴레마르쿠스식으로 생각한다면 정의와 부정의의 양편 모두에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예컨대, 도둑질하는 기술도 적으로부터 무언가를 훔쳐오는 데에 쓰인다면 정의로운 것일 수 있지만 친구에게서 훔쳐올 때 쓰이면 부정의한 것이 될 수 있다. 또 반대로 도둑질을 막고 재산 따위를 지키는 기술도 친구를 위해 사용하면 정의로운 것일 수 있지만 적을 위해 사용하게 되면 오히려 부정의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의 모순을 비웃으며 소크라테스는, '자네 말대로라면 결국 정의로운 사람은 도둑이라는 결론이군'하고 일갈하지요. 그러면서 결정적으로 이렇게 덧붙입니다. "자네는 이것을 호머한테서 배운 것 같군."

많은 독자들은 이 구절을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소크라테스가 지나가다 툭 던지는 이 구절은 아주,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여기서 비판하고 있는 정의관은 다름아닌 호머의 정의관이라는 점이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호머가 누군지는 대충 아시죠? (실존 인물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일리아드}와 {오디세우스}와 같은 서사시의 저자로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물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보다 까마득히 오래전에 살았던 인물이었지요. 그런데 그 호머의 서사시들이 그리고 있는 시기의 그리스 사회는 (또 다른 공동체주의자인) 앨러스데어 맥킨타이어가 나중에 "영웅사회"라고 부르는 그런 사회였어요. 말하자면 영웅이 대접 받는 그런 사회였던 거죠. 호머의 서사시가 바로 영웅담 아니겠습니까?

그럼 당시 영웅은 어떤 사람을 영웅이라고 칭했는가? 바로 적과의 싸움에서 적의 편에게는 최대의 해를 입힐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자기 편에는 최대의 이로움을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를 바로 영웅이라고 했지요. 엇! 폴레마르쿠스의 정의관과 뭔가 좀 통하는 것이 느껴지시나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 당시의 국가는 '친족'과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친구란 바로 친족 또는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폴레마르쿠스도 적에게 해를 입히고 친구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기억하신다면, 이제 왜 소크라테스가 폴레마르쿠스의 정의관을 호머로부터 배워온 것이라고 말하는지를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영웅사회에서는 단순히 용맹함이나 싸움의 기술 뿐만 아니라 별 잡스러운 재주들까지 미덕(virtues)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사실 원래 virtue라는 말, 또 고대 희랍어로 arete라는 말은 도덕적 뉘앙스를 갖는 '미덕'이나 '덕'이라기보다는 '능력'을 의미했어요. 그래서 훔치는 기술, 거짓말이나 말을 꾸며내는 기술 등등, 한 마디로 권모술수라고 부를만한 모든 것들이 다 적/다른 가족/다른 국가에게 해를 입히고 친구/자기 가족/자기 국가에게 이로움을 가져올 수 있는 한 '미덕' 또는 '능력'이라고 여겨졌던 것이지요.

이러한 다양한 기술들을 이용해서 '적에게는 해로움을 되돌려주고, 친구에게는 어떤 이로움을 되돌려주는 것'을 바로 정의라고 여긴 사회가 호머의 영웅사회였던 것입니다. 왜 '되돌려준다'고 말할까요? 호머의 일리아드를 한 번 생각해보시면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호머의 일리아드는 트로이의 왕자 패리스가 그리스의 왕비를 훔쳐오면서 시작된 전쟁이야기입니다. 이로부터 시작된 복수가 복수를 낳는 그런 잔혹극이 계속 이어지지요. 트로이의 핵터가 아킬레스의 사촌동생을 죽이고, 아킬레스가 여기에 격분해 출정하여 핵터를 죽이고, 심지어 자신의 마차 뒤에 그 시신을 매달아 끌고다니다가 자기 막사로 돌아오죠 ... 이미 적에게 해를 입히고 친구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모든 기술이란 해로움을 적에게 되돌려주는 데에, 곧 복수를 하는 데에 쓰인 그런 기술이었던 셈이지요.

호머의 영웅사회에서는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개인'이라는 것도 사실 없었어요. 공동체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이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주었던 거죠. 공동체 안에서 자기가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다른 구성원이 자기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자신의 '목적'(친구에게 이로움을 적에게 해로움을 가져다 주는)도 알 수 있고, 이를 위한 자신의 '미덕'도 알 수 있었지요. 그랬기 때문에, 영웅사회를 살았던 인물들은 내면성이라는 것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었어요. 무엇이든지 다 겉으로 드러나 있었던 것이지요. 내면성이 없는 사람, 즉 겉과 속이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이야말로 덕스러운 사람으로 칭송되었습니다.

이제 이 글을 읽는 분들은 플라톤이 왜 폴레마르쿠스와의 논쟁을 {국가론} 처음에 위치시켰는지도 쉽게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플라톤이 살았던 당시까지만해도 여전히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적인 정의관이 바로 호머의 영웅사회의 정의관이었고, 이것을 깨뜨려야지만 플라톤 자신의 정의관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설득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지요.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쿠스를 요리조리 몰면서, 결국 친구와 적의 구분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구분으로 전위시킨 후에, 결론적으로 정의로운 사람이란 단지 선한 사람에게만 이로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이로움을 주는 사람, 곧 보편적 선(good)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가 보편주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 드러나는 대목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소크라테스가 폴레마르쿠스를 논쟁으로 넉다운시키고 나서 나중에 가서 그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정의에 관해 그것이 각자에게 빚진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통은 부유한 가족의 일원들, 다시 말해서 세도가의 사람들이라고요. 이미 앞에서 봤듯이, 사실 케팔로스나 폴레마르쿠스도 바로 그런 부유하고 세도 있는 집안 사람들이었지요. 소크라테스가 처음부터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논쟁을 벌였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특히 과거의 영웅시대는 바로 그런 거대한 집안들 사이의 싸움과 전쟁으로 얼룩진 사회였다고 할 수 있고,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비판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호머 자신이 영웅사회의 정의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가는 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특히 호머의 일리아드의 가장 유명한 장면은 트로이의 왕 프리암이 밤에 몰래 아킬레스의 막사로 찾아가서 자기 아들 핵터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무릎꿇고 눈물로 비는 장면인데, 여기서 결정적으로 호머는 마냥 가족과 친구를 위한 것이 정의라는 논리가 사실상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 논리대로라면 핵터의 시신을 돌려주기는 커녕 아킬레스를 찾아온 프리암마저도 죽이는 것이 마땅하나, 그렇게 해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사실 자기가 패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적에 대해서도 지켜야 할 어떤 더욱 보편적인 윤리, 또는 '정의'가 있어야 한다는 호머의 관점이 여기서 살짝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호머는 이미 영웅시대의 정의관을 문학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게 사실은 맥킨타이어의 해석의 핵심이기도 하지요. 호머 이후에 이어진 비극작가들도 가족간 복수극들의 처참한 결말들을 그림으로써 이러한 비판적 전통을 이어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플라톤은 이들 작가들을 아주 싫어했지만 ... 왜 그랬는지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지요.

자, 이제 왜 샌델의 정의관이 고대그리스 정치철학의 정의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인지, 또 맥킨타이어의 공동체주의로부터도 한참 후퇴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겠지요? 샌델의 정의관은 오히려 영웅시대의 정의관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태도, 자기의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역할을 생각해봄으로써 자기의 고유한 목적을 찾고, 미덕이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웅사회의 정의관이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되는 고대 그리스 정치철학의 그것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의 정의관은 바로 영웅사회의 정의관을 극복하면서 나온 것이었다는 점, 그러한 '특수주의적 정의관'을 극복하면서 나온 것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번에 올린 글에 대해서 대글을 남겨주신 분 가운데, 샌델의 정의관은 "조폭주의" 같다는 말씀을 하신 분이 있었는데, 다른 분들도 어쩌면 이러한 평가가 약간 거칠지만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다음 번에는 아리스토텔레스로 넘어갈지 아니면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볼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는데, 어쨌든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 보겠습니다. 아, 물론 플라톤으로도 나중에 다시 돌아올 생각입니다.

'철로를 이탈한 전차' 딜레마의 두 에피소드의 차이는 무엇인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지금처럼 놀라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데에는 아마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고 싶은 하버드 대의 유명한 강의를 책으로 접해보는 것이 주는 매력도 상당할 것입니다(사실 이 경우 이 책을 읽는 것이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과 그 동기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의문스럽게 되는 면이 있지요). 또 정치철학을 잘 모르는 독자들도 접근하기 쉽게 책의 내용이 풍부한 사례와 더불어 명료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장점도 있을 것입니다(물론 샌델의 책만이 그런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겠지요).

하지만 제 생각에, 이 책을 이렇게까지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게 도와준 (적어도 내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는 샌델이 던진 몇몇 도덕적 딜레마가 가지고 있는 독자들에 대한 도발적 흡인력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 일련의 딜레마를 마주함으로써 강의를 듣는 청중과 독자는 지적인 자극을 받아 논의 과정에 스스로 뛰어들고 주어진 문제를 고민해보도록 강의가 잘 디자인 되어 있지요. 적어도 교수법의 관점에서는 참 배울 것이 많은 책이 바로 이 {정의란 무엇인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그가 첫 번째 강의에서 논하는 '철로를 이탈한 전차'의 딜레마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유튜브에서 첫 번째 강의를 지켜봤는데, 강의에 나서자 마자 샌델이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이 '전차'의 딜레마더군요. 오늘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딜레마를 잠깐 논해볼까 합니다. 원래 아리스토텔레스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내친 김에 샌델의 책을 마저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 또 이 '전차' 딜레마에 대한 논의가 아리스토텔레스로 들어가는 길목에 좋은 화두를 하나 던져주는 것 같다고 여겨졌습니다. 오늘 논의를 마지막으로 샌델의 책 자체에 대해서는 대충 논의를 마무리하고 좀 더 '정의' 문제의 본질을 향해 접근해 들어가 볼까 합니다.

알다시피 이 전차의 딜레마는 크게 두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에피소드는 이렇습니다. 당신이 운전하고 있는 전차가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데, 앞을 보니 철로에 인부 다섯 사람이 작업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대로 가면 다섯 인부를 모두 죽일 것이 확실하다(또는 그것이 확실하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비상철로 쪽을 보니 그 곳에는 단 한 사람의 인부만이 작업을 하고 있다. 당신은 다섯 사람을 죽이겠는가? 아니면 비상철로 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 사람만 죽이겠는가?

샌델은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섯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한 사람을 죽이는 쪽을 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한 말이겠지요. 하지만 이 당연한 해결책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그는 곧 두 번째 에피소드를 들려줍니다. 이번에는 비상철로와 같은 것은 없고 다만 브레이크가 고장난 전차가 다섯 명의 인부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당신은 직접 전차를 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철로 위에 있는 다리의 난간에 서서 이 광경을 보고 있다. 이 때 당신 옆에는 어떤 뚱뚱한 남자가 함께 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당신은 이 뚱뚱한 남자를 살짝 밀기만 해도 그 사람을 난간 아래로 떨어뜨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당신이 이 뚱뚱한 사람을 밀어 떨어뜨린다면, 그 사람은 전차의 진행을 가로막아 다섯 명의 인부를 살릴 수 있음이 확실하다(또는 그렇다고 가정하자). 당신이 직접 뛰어 내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당신의 몸무게는 전차를 멈추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당신은 이 뚱뚱한 남자를 밀어 다섯명의 인부를 살리겠는가?

샌델은 이 경우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뚱뚱한 남자를 밀어선 안 된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말하지요. 제가 보기에도 그럴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샌델은 묻죠. 왜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택할 수 있었던 도덕적 원칙(다섯을 죽이는 것보다 하나를 죽이는 것이 낫다)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거부되어야 하는가? 뚱뚱한 남자나 비상철로 위의 인부나 모두 죽으려고 거기 서있었던 것은 아닌데, 왜 비상철로 위의 인부는 죽여도 되고 뚱뚱한 남자는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이 딜레마에 대해서 샌델이 자신의 최종적인 입장을 독자들에게 정확히 밝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딜레마를 통해서 샌델이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무엇인가라기보다는 두 가지 도덕적 입장 사이의 대립, 곧 행위의 '결과'(또는 성과)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적 입장과 행위의 '동기'를 중시하는 칸트주의적 입장 간의 대립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자신의 입장을 밝힐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샌델 주장의 요점은, 여기서 우리가 어떤 도덕적 원칙이든 그것을 일관되게 고수하고자 한다면, 이 두 상황에 동일한 원칙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당신이 일관된 공리주의자라면 결과를 중시하여 다섯 사람 대신 비상철로 위의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선택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뚱뚱한 남자도 다리 아래로 밀어 떨어뜨려 희생시킬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는 겁니다. 또 반대로 당신이 칸트주의자라면 그 뚱뚱한 사람을 '목적'으로 대해야지 한낱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동기가 중요해지기 때문에 그 사람을 밀어 떨어뜨려선 안 되며, 마찬가지로 다섯 사람의 인부를 구하기 위해 비상철로 위에 있는 한 사람의 인부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다섯 사람을 죽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요? 여러분은 다섯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 뚱뚱한 사람을 난간에서 밀겠습니까? 아니면 타인을 목적으로 대해야지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에 따라 비상철로 쪽으로 전차의 방향을 틀지 않고 다섯 명의 인부를 향해 돌진하는 전차를 그대로 놔두겠습니까? 어느 쪽을 택하든 좀 곤란한 느낌이 들지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진행된 어떤 분의 논의를 보니, 자신은 이 경우 단호하게 공리주의의 입장을 취할 것이며, 그 입장에 따라 뚱뚱한 사람을 주저 없이 밀겠다고 말하더군요. 참 용감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 분이 정말 용기를 발휘해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ㅎㅎ 샌델의 경우 자신의 입장을 우리에게 명확히 들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줄곧 공리주의는 집요하게 공격을 하는 반면 칸트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나마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다섯 사람을 구하기 위해 비상철로 위의 한 사람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는 쪽을 선택할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두 입장이 모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누군가가 한 명 대신 다섯 명을 죽일 것을 택한다면, 그 사람은 제가 보기에 그냥 '멍청한 사람'일 따름이고,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누군가가 그 뚱뚱한 사람을 밀어 떨어뜨리기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실행에 옮긴다면, 그 사람은 살인을 저질렀으므로 법적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샌델은 멍청한 쪽이라면, 완고한 공리주의자는 살인자 쪽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하긴 둘 다 멍청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완고한 공리주의자도 자신의 교조적 원칙을 위해 엄한 사람을 죽인 꼴이니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단호하게 다섯 사람을 살리고 한 사람을 죽이는 쪽을 택할 것이지만, 두 번째 경우에는 뚱뚱한 사람을 밀어 난간 아래로 떨어뜨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윤리적 결정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결국 모든 것은 이 두 에피소드 사이에 모종의 차이가 있는가, 또 있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물론 샌델은 이 두 에피소드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도 없다고 역설하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주장해야지만 현실적으로 이 두 에피소드 사이에서 하나의 도덕적 딜레마가 생산되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두 에피소드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매우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멍청하거나 살인자가 되는 양자택일만을 우리 앞에 남겨두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차이가 무엇일까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전차를 운전하고 있는) '나'는 결정의 모든 책임을 그야말로 홀로 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상철로 위의 다섯 사람의 인부도, 또 비상철로 위의 한 사람의 인부도 이 결정(비상철로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인가 아니면 정상철로 위에 남아 계속 돌진할 것인가 하는 결정)에 참여하거나 개입할 수 있는 길이 상황에 의해 철저히 봉쇄되어 있지요. 그들은 심지어 이 전차가 자신 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고 가정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정하지 않으면 애초에 샌델의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들이 만일 전차를 보고 스스로 피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전차가 그들을 향해 돌진해도 죽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순간 더 이상 도덕적 딜레마는 실효성을 잃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샌델은 전철이 어느쪽으로 돌진하든 그 방향에 서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을 것이 확실하다고 가정하자고 말하지요.

하지만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내'가 결정의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지는 매우 불확실하며, 사실 그 결정을 내릴 권리는 어떻게 보면 나 자신에게 전혀 없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뚱뚱한 사람은 스스로를 희생하여 다섯 사람을 구할 결정을 (나와 상관 없이) 혼자 내릴 수 있고, 제가 밀지 않아도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여 뛰어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그 사람을 민다면, 저는 그 사람의 목숨에 대한 결정을 그 사람을 대신해서 해준 셈이 되는 것이고, 정확히 그렇게 명백한 월권행위를 저지른 셈이 되는 것이지요.

첫 번째 에피소드의 비상철로 위의 인부를 희생시키는 경우 이러한 월권행위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상철로 위의 인부는 상황의 강제에 의해 이미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 뚱뚱한 사람은 결정과정에서 배제되어 있기는 커녕 그 결정 과정의 당사자이며, 심지어 나 자신보다 더 직접적인 당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왜냐하면 그 사람만이 몸을 던져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정의 권리를 그에게서 강탈하여 제가 그 사람 결정을 대신해 주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능동적인 '살인행위'가 되는 것이지요.

바꿔 말해서,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나는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주체가 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한 바 없이 수동적으로 그 결정을 내릴 위치에 서도록 상황에 의해 강제당했다고 볼 수 있다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나는 그러한 결정의 주체가 될 것을 능동적이고 독단적인 방식으로 결정한 셈입니다. 이러한 결정을 위한 결정, 결정을 하기로 한 결정, 다시 말해서 사태에 대한 객관적 판단 뿐만 아니라 도덕적 판단 및 실행의 '주체'의 자리에 자신이 설 것인지를 말것인지를 결정하는 이러한 '결정에 앞선 결정'은 칸트적 원칙과 공리주의적 원칙 중 어떤 원칙을 취할 것인지 하는 결정보다 앞선 훨씬 더 근본적인 결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정을 하기로 결정을 한다면, 어떤 원칙을 취하기로 결정을 하든 간에, '나'는 이미 그러한 원칙들을 결정할 권한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박탈해서 독차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결정을 할 결정'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이 질문을 샌델은 결코 던지지 않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그것을 부당전제한 채 독자들을 코너로 몰아세우고 당신이 따를 원칙을 결정하라고 다그치지요.

샌델은 이러한 '결정을 할 결정'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기 때문에 그 뚱뚱한 사람의 발언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미처 이 뚱뚱한 사람은, 자신이 뛰어 내린다면 다섯 사람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자체를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동시에 그 사람에게 현재의 정황을 설명해주고, 그 사람에게 희생을 권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 사람에게 나와 함께 뛰어내리지 않겠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한 사람이 뛰어 내리는 것보다는 두 사람이 뛰어 내리는 것이 전차를 멈추기엔 훨씬 나을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샌델은 이러한 결정을 위한 논의 과정(a decision making process) 자체를 애초에 필요한 과정으로 고려하기를 거부합니다. 이미 도덕적 선택 또는 결정의 주체는 나 자신일 수밖에 없으며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것, 나의 단일한 의지의 소관이라는 것을 마치 하나의 기정사실인양 전제해놓고 모든 논의를 출발시킵니다. 하지만 도대체 이 결정의 권리를 누가 나에게 준 걸까요?

이러한 타인과의 결정과정을 생략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샌델이 부지불식간에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상황적 다급함이 그것일까요? 지금 상황은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이다. 지금 당장 이 뚱뚱한 사람을 밀어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다섯 사람은 곧 죽게 될 것이다. 이 뚱뚱한 사람과 논의를 하거나 그를 설득할 여유는 없다. 그를 희생시킬 수 밖에 없다, 운운. 그렇게 놓고 보니, 샌델이 책에서 다루는 전차의 딜레마와 유사한 또 다른 딜레마들에서도 이런 다급함은 많은 경우 이야기의 공통된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긴 그런 상황이 있을 수 있지요.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그 다급함을 이유로 해서 모든 결정권을 타인에게서 박탈하여 자기 자신이 독차지하는 순간, 그 사람은 스스로를 법 위의 위치, 거의 '신의 위치'로 가져다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이 위치가 무엇인가? 그것이 사실은 정확히 우리가 다뤄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요? 게다가 우리가 여기서 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정의'의 문제라면, 그것은 우리 문제의 정치적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시다시피 이러한 상황의 다급함을 이유로 '예외 상태'를 선포하고 결정의 민주적 과정을 생략한 채 홀로 (극단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주권 또는 주권자의 논리입니다. 주권자는 사실 법을 만들고 또 그 법을 뜯어 고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존재라는 점에서 정확히 법 '위'에 있는 자라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도대체 이 주권자는 어떻게 이런 지위를 부여받게 되는걸까요? 어떤 정당한 절차를 통해, 이런 무시무시한 주권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이 주권자는 과연 한 사람 또는 단일한 의지를 지닌 존재일까요? 주권자는 한 사람이어야 할까요, 여러 사람이어야 할까요, 또는 모든 사람이어야 할까요? 다시 말해서 누가 주권적 권리를 갖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만일 주권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효과적인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될까요? 더 나아가서 과연 주권이 누구에게 있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정의의 문제를 해명하는 데에 결정적인 질문일까요? 이런 질문들은 분명 알기 쉬운 질문들이 아니며, 정치철학 및 정의론에 있어서 많은 입장들의 분열의 근원에 놓여 있는 핵심적인 쟁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샌델은 이런 논의를 이 책의 어디에서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혹시 여기서 어떤 분들은, '갑자기 전차 이야기를 하다가 주권 문제로 논의를 확장하다니 너무 논리비약이 심한 것 아닌가' 하고 반문을 하실 것 같기도 합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한 것은 사실 제가 아니라 샌델 자신이라는 점을 상기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샌델은 자신의 책에서 이러한 전차의 딜레마와 평행선을 그리는 몇몇 유사한 딜레마, 예컨대 아프가니스탄의 염소치기에 대한 딜레마나, 테러리스트 고문에 대한 딜레마를 논하지요. 나중에 적들에게 자기 부대의 위치를 밀고할 수도 있는 아프카니스탄의 염소치기 소년을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또 조금 있으면 터질지도 모르는 폭탄테러에 의해 희생될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우리가 붙잡은 테러리스트를 고문할 것인가 말것인가? 이런 딜레마들은 모두 주권에 관련된 딜레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안녕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주권자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흥미롭게도 샌델은 결과만 중시하여 고문과 살인을 정당화하는 공리주의를 비판하면서 염소치기 소년의 살인과 테러범의 고문 또한 비판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 끝까지 명확한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로 이러한 성격의 딜레마들을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보여주면서(그렇게 독자들을 유혹하면서!), 주권자의 환상과 불장난을 하고, 결국 이러한 딜레마를 도덕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우리가 끊임없이 몰릴 수밖에 없으며 그 경우 우리는 칸트적 보편주의에 입각해서 모든 결정을 내리기가 지극히 어려워진다는 점을 강조하지요.

어쨌든 이 모든 사례들 속에서 샌델은 주권적 권리(물론 그것을 그렇게 명명하지 않은 채)가 하나의 단일한 의지를 가진 주체의 권리인양 전제하고 출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그렇게 자명한 것일까요? 어떻게 보면 정치철학의 문제, 그리고 정의의 문제는 많은 경우 이러한 주권의 곤란들을 중심으로 회전해 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샌델이 스스로 따른다고 공언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바로 이러한 주권문제에서 비롯되는 여러 곤란들(또는 아포리아들)을 자신의 중심과제로 삼고 고민했다는 점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정의의 문제는 (샌델도 잠시 언급하지만) 관직과 명예(offices and honors)의 분배에 관련되어 있는데, 여기서 명예란 결국 정치적 영향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그것은 권력, 곧 주권의 분배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샌델의 주장과 달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체의 목적이나 미덕을 들먹이는 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한 목적이나 미덕이라는 것은 오히려 질문의 출발점을 구성할 따름이지요. 반면 샌델은 공동체의 목적이나 미덕이 미리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인양 말하면서 함께 잘 생각해보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요. 모든 갈등은 그렇게 해서 샌델에게서는 항상 미리 해결된 방식으로만 나타나게 됩니다.

그의 이러한 논리의 절정에 있는 사례는 그가 말하는 동성애 결혼의 경우에서 찾아지는 것 같습니다. 샌델은 동성애 결혼도 결혼이라는 제도의 목적만 잘 따져보면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라고 주장하지요. 그는 보통 동성애 결혼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결혼이란 재생산, 곧 아이를 낳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동성애자들의 경우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혼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그 논리를 반박하지요. 하지만 사실 이성애자들도 아이 없이 사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혼의 진정한 목적이 반드시 아이를 낳는 데에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결혼의 목적은 배우자와의 배타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동성애 결혼은 허용될 수 있다.

보수주의자인 샌델으로서는 상당한 파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전통적으로 결혼이 배우자와의 독점적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여겨진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에 있을 뿐만 아니라, 정작 많은 동성애 운동가들은 결혼 제도 자체를 반대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들은 결혼제도가 그 자체로 이성애적인 사랑을 특권화하는 제도이고 많은 개인적 권리들의 인정을 결혼과 연계함으로써 가족주의적 가치관을 따르는 자들의 권리만을 인정하려는 그 자체 보수적인 제도라고 비판하지요. 그들은 묻습니다. 왜 두 사람이 사랑하여 함께 사는 데에 국가의 간섭과 인정이 필요하단 말인가? 결혼 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지의 혜택을 주길 거부하는 현재의 정책이 오히려 문제가 아닌가? 그렇다면 동성애 결혼을 위한 운동은 차별을 반대한다는 미명 하에, 오히려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사는 많은 싱글들, 특히 싱글 맘들, 또 성노동자 등과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급진적 성정치를 위한 운동 내에 분열만 가져오는 그런 이슈가 아닌가? 대표적으로 미국의 급진 여성주의 철학자이자 동성애운동가인 주디스 버틀러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렇다면 적어도 샌델의 생각과 달리 동성애자들의 생각도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논쟁이 단순히 어떤 제도나 공동체의 목적만 잘 따져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읽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적어도 이렇게 나이브한 공동체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 점을 살펴볼까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의 기본 얼개

 

지난 번에는 마이클 샌델의 '철로를 이탈한 전차'의 두 가지 에피소드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샌델이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있어서 각각의 개인이 어떤 권한을 갖는가 하는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지난 번 포스팅에 대한 대글에서 이런 문제제기를 해주셨더군요. 만일 샌델이 말하는 대로 뚱뚱한 사람을 내가 직접 밀지 않고, 핸들을 돌려 난간을 열어 그를 떨어뜨릴 수 있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을까? 실제로 책에서 샌델은, 사람을 직접 죽이는 행위가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면,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전차 핸들을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핸들만을 돌려 뚱뚱한 사람을 아래로 떨어뜨릴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고 말하지요.

그러나 저의 비판의 요점은 첫번째 에피소드와 두번째 에피소드를 비교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차이는 타인(여기서는 뚱뚱한 사람)의 결정의 권한을 내가 능동적인 방식으로 침해하고 강탈해 왔는가, 아니면 내가 상황의 강제에 의해 수동적으로 그 결정을 하도록 강제되었는가에 있기 때문에, 내가 그 뚱뚱한 사람을 직접 손으로 밀었는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그 사람을 떨어뜨릴 수 있게 되었는지 등은 본질적 차이를 만들지 않습니다. 실제로 샌델 자신도 핸들을 돌려 난간을 열어 떨어뜨리나 밀어 떨어뜨리나 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가정을 했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별도로, 샌델의 입장에서는 제 논변에 대해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반박을 시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정을 하나 더 추가하기로 하자. 곧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당신 옆에 서있는 그 사람은 뚱뚱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이유로 인해 지금 의식불명상태에 빠져있다. 이 사람은 의식불명으로 인해 첫번째 에피소드의 비상철로 위의 인부처럼 현재의 상황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결정과정에서 미리 배제되어 있다. 이 경우 이 사람을 밀어 떨어뜨려도 되는가?'

말하자면 비상철로 위의 인부나 의식불명의 사람이나 모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조건이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냐는 거지요? 그렇다면 샌델은 왜 전자는 죽여도 되고 후자는 죽여선 안 된다는 것인가 하고 충분히 물을 수 있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아마도 샌델이 제 논변에 반박을 가해올 수 있는 가능한 방식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물론 샌델은 제가 그를 반박하고 있는 것도 전혀 모르니 이건 저 혼자 하는 일종의 브레인 게임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 두 경우에도 여전히 차이는 있습니다. 차이는 더 미세하지만 그 만큼 더 중요하고 이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비상철로 위의 인부는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상황의 강제'에 의해 결정과정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사정이 동일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 뚱뚱한 사람이 의식불명의 상태였고 그래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면, 그 사람은 사실 외적인 상황의 강제에 의해 결정과정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어떤 자질 또는 능력의 내적인 부재로 인해서 결정과정에서 배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우 문제는 훨씬 더 정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식불명의 경우만이 이런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이 뚱뚱한 사람이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경우, 또 전신마비로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스스로를 난간 아래로 던질 수 없는 경우, 또는 심지어 어떤 장애로 인해 본인의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경우 등도 유사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어떤 자질이나 능력의 부재를 이유로 결정과정에서 일정하게 배제되어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이유로 이 사람의 고유한 결정권을 박탈할 수 있는 걸까요?

이와 같이 변형된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또는 육체적 "장애" 때문에 제대로 발휘하기 곤란한 결정권을 어떻게 실제의 결정과정 안에 여전히 반영시킬 수 있을 것인가, 또는 단적으로 그들을 어떻게 결정과정에서 대표/대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첫 번째 에피소드의 비상철로 위의 인부의 경우와 달리) 비상하게 정치적인 문제이며, 정의의 문제의 핵심을 이루는 쟁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샌델은 전차의 딜레마를 논하면서, 거기에 이러한 복잡하고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는 층위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지요. 아마 샌델로서는 칸트의 입장과 공리주의 입장의 대립만을 보여주는 데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걸일텐데, 저는 이 층위에 우리가 반드시 주목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과연 공정한 결정을 위해서는 의식불명의 사람까지도 대의해야 하는 것일까요?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전신마비에 걸린 사람도 우리는 대의해야 할까요? 이들은 어떤 기본권을 가질까요? 혹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또는 덜 대의해야 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요? 예를 들어, 옆에 서있던 뚱뚱한 사람이 사실은 그 나라의 대통령이었다고 가정해봅시다. 평범한 인부 다섯을 살리기 위해 그 대통령을 밀어 떨어뜨리는 것이 올바른 결정일까요? 이번에는 반대로 그 뚱뚱한 사람이 그곳에서 구걸을 하고 있던 다 죽어가던 노인네였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밀 수 있는 위치에 서있던 '나'는 대통령이라고 해봅시다. 이 경우 나는 이 결정권을 독차지하고 그 사람을 밀어도 되는 게 아닐까요? 이렇게 개인(또는 집단)의 자질, 능력, 자격 등의 문제가 제기될 때, 결정과정에서 이들에게 어떤 권리를 어떤 절차를 통해 얼마나 부여해 주는 것이 진정 정의로운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볼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을 아주 심각한 방식으로 고민했던 철학자였습니다. 비록 전에 말씀 드렸듯이 플라톤에서 고대 그리스의 정의론이 출발했다고 볼 수는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다수의 정의론에 일종의 '프레임'을 준 철학자였다는 점에서 가히 정의론의 아버지라고 부를만 하다는 생각입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실제로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안한 정의론의 '구조'를 통해 매우 알기 쉽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니코마쿠스 윤리학}(이하 {윤리학}으로 약칭)과 {정치학}에 등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 하면 흔히 {정치학}만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정치학}은 {윤리학}과 하나의 짝으로 저술된 것입니다. 이를테면 {윤리학}이 1부, {정치학}이 2부를 이루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 5권에서 정의론의 기본 구조를 한 차례 개략적으로 규명하고, 거기에서 제기되는 근본적 곤란을 {정치학}으로 그대로 옮겨와서 정체(regimes)의 문제 등과 풍부하게 관련지으면서 해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지요.

하지만 샌델은 자신의 공동체주의적 정의관의 핵심적 주장을 흥미롭게도 {윤리학} 1권에서의 논의(5권의 논의가 아니라)에 준거해서 만들어냅니다. {윤리학} 1권은 바로 목적들의 위계적 체계로서의 공동체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이러한 목적들의 정점에 놓여있는 최고의 목적으로서의 공동선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 곳이지요.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그의 논의가 '정의'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윤리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나 결론이라기보다는 단지 출발점에서 그가 취하는 하나의 가설(hypothesis)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학문을 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의심할 수 없는 근본 원칙으로부터 시작해서 거기에서 연역되는 결론들을 도출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러한 원칙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받아들이는 생각을 하나의 가설로 취하고 점점 논의를 발전시켜 나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하지요. 달리기 경주를 하고 있다면, 지금 우리가 반환점을 향해 뛰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반환점을 돌아 원래의 출발점을 향해 돌아오고 있는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를 헷갈리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그럼, 윤리학/정치학의 경우는 어떨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정치학은 의심할 수 없는 근본 원칙으로부터 출발하는 방법을 적용할 수 있는 연구영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받아들이지만 증명되지 않은 하나의 가설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는 학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어떤 기초적인 관념에 대한 임시적 규정을 주고, 거기에서 발견되는 용어의 모호함이나 불완전한 논리적 고리 따위를 제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다시 논의를 전개시키는 방식을 취하지요. 이를테면 처음부터 완제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제품을 계속 보완하는 가운데 조금씩 개선해 나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니 샌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및 정치학의 가장 첫 머리, 곧 {윤리학} 1권에 나오는 말만 가지고 그의 정의관을 설명하려고 했다는 것은 뭔가 크게 문제가 있는 접근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의 한 구절에서 {윤리학} 1권에 나온 논의가 정치철학의 근본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지적합니다.

시간이 많다면, {윤리학} 1권부터 차근차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쫓아가는 것이 좋을 테지만, 사정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미덕(virtue)과 정의(justice)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의 기본 얼개를 간단히 살펴볼까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이나 동물의 '선'과 대비되는) 인간의 선(the human good)을 '미덕에 따른 정신의 활동(activity of soul in conformity with virtues)'이라고 말하고 곧 여기에 등장하는 '미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규정하려고 시도합니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중용론'이지요. 많이 들어보셨지요? 너무 지나쳐서도 안되고, 너무 부족해서도 안되는 중간,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미덕이라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중간점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미덕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악덕(vice)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킬레스와 같이 무기를 아주 솜씨있게 잘 다루는 병사가 싸움터에서 적진에 뛰어 들어 많은 적군과 싸우는 용기를 발휘한다면 그것은 미덕일 수 있지만, 만일 무기를 제대로 다루는 훈련도 받지 못한 사람이 동일한 상황에서 뛰쳐나가 수많은 적군과 싸우려고 든다면, 그것은 용기가 아닌 만용이며, 자기를 해하는 악덕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덕은 단순히 어떤 미리 주어진 '절대적 중간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의 조건에 맞게 규정되는 '상대적 중간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덕이 절대적 방식이 아니라 상대적 방식으로 규정된다는 점, 곧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규정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덕이라는 관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떤 점에서 정의가 미덕에 접합되어 있으면서도 또한 동시에 구분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줍니다.

우선, 미덕은 어떤 한 사람이 갖추어야 할 올바른 품성(character) 및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한 사람의 미덕은 다른 사람하고는 상관 없이, 그 사람의 고유한 조건에 비추어 지나침과 부족함 없는 평형점, 곧 중용점을 찾아냄으로써 규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이러한 중용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각 사람마다 다르게 규정될 수 있습니다.

반면 정의는 한 사람에 관련되는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과 관련되는 문제입니다. 혼자서도 덕스러운 품성이나 능력은 가질 수 있지만, 결코 혼자서 정의로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정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규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의도 그것에 관련된 사람들로 인해서 절대적인 방식이 아니라 상대적인 방식으로 규정된다는 점에서는 미덕과 같지만, 그 상대적인 측면이 하나가 아니라 적어도 둘 또는 그 이상의 변수를 포함하게 됨에 따라 문제가 매우 복잡해지고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납니다.

조금 있다가 우리는 다시 이 문제로 돌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를 분류하는 틀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정의는 크게 두 영역으로 나뉩니다.

- 전체 정의 (complete justice)
- 부분 정의 (partial justice)

여기서 전체 정의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법이 규정하는 규범 전체'를 말합니다. 공동체의 법을 모두 지키는 것이 곧 정의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영역은 꼭 정의 그 자체의 핵심 원리와 관련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는 다양한 규정들(예컨대 세금은 현물로 낼 수 있지만 살아있는 가축으로 내서는 안되며 ... 따위의 규정)도 포함될 수 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에서의 정의'이지 정의의 '고유 영역'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심을 두는 영역은 오히려 부분 정의 입니다. 여기가 정의론의 본래 영역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부분 정의는 두 가지 하위영역으로 나뉘어 집니다.

- 교정정의 (rectifying justice)
- 분배정의 (distributive justice)

교정정의라는 것은 상거래에서 발생한 잘못(wrong)이라든지, 또 범죄적 잘못을 '교정'하는 정의를 말합니다. 반면 분배정의는 공동체의 어떤 자원들, 관직들, 명예들의 분배에 관련된 정의를 말합니다. 부분정의의 이 두 하위영역 가운데, 정치학의 고유한 대상을 이루는 정의의 영역은 무엇일가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것은 교정정의가 아니라 분배정의입니다. {윤리학} 자체에는 이 말이 나오지 않지만, 나중에 {정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국가란 같은 장소에서 함께 살기 위한 결사가 아니며, 교환을 순조롭게 하거나 상호간에 옳지 못한 짓을 막기 위해서 생겨난 결사도 아닌 것이 명백하다. 사실 이들은 국가가 존재하기 이전에 있어야 하는 조건이다. (1280b12)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가 상거래(교환)의 잘못과 범죄적 잘못(상호간에 옳지 못한 짓)을 교정하는 결사가 아니라고 못박아 말합니다. 그러한 잘못의 '교정'은 국가가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다 정리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잘못들이 정리되고 나서야 비로소 국가가 시작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정치학이 바로 국가에 대한 학문인 한에서(사실 정치학과 국가는 둘 다 그리스어에서는 폴리테이아politeia입니다), 정치학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정의'의 영역은 교정정의가 아니라 분배정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면, 사실 부당하게 취한 이득이 있다면 다시 갚아줘야 한다든지, 또는 다른 사람에게 가한 상해에 대해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든지 하는 식의 '정의'의 관념, 곧 '각자에게 빚진 것을 되갚아야 한다'는 정의의 관념은 바로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논박하는 폴레마르쿠스의 정의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여기서 이러한 정의관은 국가적 공동체가 관심을 갖는 정의의 영역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지요. 플라톤도 정의란 친구에게만 이로움을 가져다주고 적에게는 해로움을 가져다 주는 것 처럼 특수주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 그것은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간에 모두에게 선(good)을 가져다주는 보편주의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도 여기서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보편주의가 고대 그리스 정의관의 핵심이지요.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좀 더 이론적인 방식으로 그러한 보편주의적 정의가 제대로 확립되는 영역은 교정정의의 영역이 아니라 분배정의의 영역이라고 밝혀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배정의 영역에 확립되어야할 정의가 보편주의적 정의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교정정의의 영역에서와는 달리 분배정의의 영역에서는 서로 교정해야할 잘못(wrong)이라는 것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잘못이 발생한다면,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도록 강제할 정의관념이 필요해지고, 결국 다시 분배정의의 영역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대가를 요구하며 앙갚음을 하는 교정정의가 판을 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학은 이러한 사태를 막는 길을 찾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치학의 목표는 공동체의 구성원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의 이익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불이익(해로움)을 가져다주지 않는 보편적 분배정의의 관념을 발견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교정정의의 영역과 분배정의의 영역에 적용되는 상이한 두 원리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 두 영역에 두 가지 다른 수학영역을 대응시킵니다. 교정정의 영역은 (가감연산을 주로 하는) 산수(arithmetic)의 원리가 적용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면, 분배정의의 영역은 기하학(geometry)의 원리가 적용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야기가 조금 복잡하지요? 정의의 분류만으로도 이미 복잡한데, 왠 수학까지 동원이 되나? 그러나 설명을 들어보시면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교정정의와 분배정의의 구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서 다시 중요해지는 것이 앞서 말한 미덕과 정의의 구분입니다. 정의는 미덕과 달리 한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둘 이상의 사람이 관련되는 문제라고 말했지요. 교정정의도 분배정의도 그것들이 정의인 한에서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정정의에서 적용되는 원칙은 잘못을 가한만큼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보상을 해야한다는 원칙입니다. 따라서 누가 누구에게 잘못을 가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한 잘못만큼을 다시 돌려주면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귀족이 평시민(데모스)을 다치게 하든 아니면 평시민이 귀족을 다치게 하든 간에, 결과는 똑같습니다. 모두 잘못을 범한 만큼 똑같이 보상을 하거나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평시민이라고 해서 벌을 더 받거나 귀족이라고 해서 벌을 덜 받을 수는 없습니다. 상거래에서도 마찬가지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상거래에서 한쪽이 1000원만큼의 부당 이익을 봤다면, 그 사람이 누구이든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 간에 상관 없이 다른 쪽에게 1000원을 돌려줘야 하는 것이지요. 귀족이라고 덜 돌려줘도 된다든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더 돌려줘야 된다든지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정의에 관련되는 사람들은 사실 정의의 '계산'에서 변수(variables)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단순히 한 쪽에 부당하게 더해진 것을 다시 빼서 다른 쪽에 더해주는 산수의 원리, 곧 동일한 양의 덧셈-뺄셈의 원칙을 적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반면 분배정의에서 적용되는 원리는 다릅니다. 여기서는 산수의 원리가 아니라 기하학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여기서 '기하학'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함에 있어서 독자들이 조금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이 용어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오늘날과는 조금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기하학이라고 하면 도형을 다루는 수학적 학문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고대 그리스에서 이것은 비례식을 다루는 학문을 의미했다고 합니다(도형학은 그것의 사례 또는 일부로 여겨졌지요). 다시 말해서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은 a:b = c:d 와 같은 비례 공식을 다루는 학문을 의미했습니다.

왜 이러한 비례식이 필요해질까요? 왜냐하면 분배정의에서는 (교정정의의 영역에서와 달리) 관련된 사람이 누구인가가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공평한 분배의 몫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기여도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를 가정해봅시다. A와 B라는 사람이 각자 출자를 해서 회사를 차렸습니다. A는 1000만원을 냈고, B는 2000만원을 냈습니다. 그리고 일년 동안 둘은 열심히 일을 해서 600만원의 순이익을 낼 수 있었습니다. 이 경우 A와 B가 똑같이 그 순이익을 나누어 각자 300만원씩의 배당금을 받는 것이 공평할까요? 아마 그렇게 한다면 두배의 출자금을 낸 B는 이러한 분배가 잘못(wrong)이라고 주장하면서 대가를 치를 것을 A에게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교정정의로의 퇴행(regression)을 막기 위해서라도 비례식을 동원함으로써 공평한 분배의 몫을 계산해야 하는 것이지요.

A : B = 1000만원 : 2000만원 = 200만원 : 400만원

이러한 비례식에 따라 B는 A보다 2배의 이익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B의 이익은 A에게 어떤 불이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A도 혼자서는 회사를 차린 경우보다 B와 함께 회사를 차려서 더 많은 자본금으로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었으니, 손해를 본 것이라고 할 수 없고 오히려 이익을 봤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교정정의 영역과는 달리 분배정의의 영역에서는 잘못이 발생하지 않고, 한쪽의 이익이 다른 쪽에 대한 해로움이 되지 않는 공평한 분배의 원리를 찾아내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는 이러한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샌델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의관과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정의관은 이미 상당히 다르지요? 우리는 점점 더 커지는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분배정의를 잘 정리한 다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어떤 난제(aporia)가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다음에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한 몇 주동안은 개인적으로 바쁜 일이 있어서 연재를 잠시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몇 주 후에 뵙겠습니다.


▒▒The Autonomy 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