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beyond-letter

팀켈러_탕부하나님

유산균발효중 2021. 1. 8. 07:45

개인적으로는 유행하는(?) 저자들의 신앙서적을 닥치는대로 읽었던 시기는 20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완벽하게 삶으로 소화되지 않는 교조적인 지식이 쌓여가며 여러모로 괴리감을 느꼈고, 성경자체에 집중하는 글들을 지향하면서 신앙서적과 한동안 좀 멀리 지냈다. 작년에 (오랜 스승인) 유진 피터슨의 글을 다시 읽으며, 예전과는 다른 울림이 있는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외국어로 듣는 설교와 이제 멀어져버린 한국 교회의 분위기는 물론 공동체보다 개인적 신앙을 강조하는 환경에 있다보니 스스로 근육을 키워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요즘이다.

그러던 중 , 팀켈러의 '탕부하나님'을 다시 읽는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잃어버린 두 아들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해석한 책이다. 복음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는 방탕함(둘째아들)과 역시 그것만큼이나 복음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드는 도덕(첫째아들)을 통찰력있게 해석했다. 사실, 탕자의 비유가 아닌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라고 말해야한다는 명제에서 이미 책 한권의 주제의식이 다 들어가 있다.

그동안의 누가복음은 잃어버린 아들이었던, 발칙하게도 멀쩡하게 살아있는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땡겨받아 흥청망청 쓰고 망해 다시 아버지를 찾아와 받아들여지는 둘째. 즉 잃어버린 존재인 우리가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팀켈러는 여기에 첫째의 내러티브를 더 풍성하게 보탠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들이 바리새인이었던 점, 비유 안에서 첫째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가 클라이막스부분에 열린결말로 처리된다는 점이 비유의 의도를 더 명확하게 한다. 아마 대부분의 교회인(!)들이라면 당연히 첫째에게 더 공감을 할텐데, 그동안 들었던 이야기에서는 늘 둘째 이야기 뿐이다. 둘째처럼 방탕하게 한번 다시 살다가 회심하면 더 드라마틱한 구원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것처럼. 

아마 이런 이유로 '탕부 하나님'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일으키며 많이 회자되는게 아닐까. 나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보였던 탕자의 비유는 사실, 두 아들의 비유였기 때문에. 특히 도덕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고하는 기복적인 신앙과 종교주의에 빠진 교회안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 

--팀켈러의 말들을 인용해본다. 

방식만 다를  둘다 자기 마음 속에서 집착하고 있는 목표물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이용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재물이라 믿는다. 

당신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든다면 당신의 모든 도덕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속에서 정말 원하는 것들을 그런식으로 그분께 받아 내려는 것이다. 

(살리에리의 회고) 나는 하나님께 재능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려고 본능적 욕망마저도  물리치고 있었건만, 모차르트는 약혼까지  상태에서 온갖 방종을 일삼는데도 아무런 징계가 없었다.

(왕에게 당근을 바친 농부와 검은색 종마를 바친 귀족의 이야기에서) 

당근을 바친 농부가 왕에게 땅을 얻었다는 소문을 듣고 검은색 종마를 바친 귀족. 아무것도 주지 않는 왕앞에서 어리둥절해 하자, 왕은 이렇게 말했다.   농부는 당근을 나에게 주었으나 그대는 말을 그대 자신에게 주었다.”

 부류의 사람들은 선행 자체가 즐겁거나 사람들을 사랑해서 선을 행하는게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들이 양식과 옷을 베푸는 대상은 굶주린 빈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뿌리 깊은 이기심이 고스란히 건재할 아니라 두려움에 기초한 도덕이 오히려 이를  부추긴다. 

형이 아버지와 맺은 관계에는 춤이나 흥겨움이 없다. 선행으로 하나님을 통제하여 구원을 얻어내려 하는  당신은 여태껏 자신이 그분께 충분히 착했는지  길이 없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즐거워하심을 결코 확신할  없다. 이런 확신이 없을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인가? 삶이 잘못되거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마다 당신은 자신이 뭔가 잘못 살아서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든다.  다른 증상은사람들의 비판을 받을  기분이 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참히 무너져 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추상적으로 느껴져 당신 삶에서 진정한 능력을 별로 발휘하지 못하다보니 사람들의 인정이라도 받아야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할 있기 때문이다. 죄책감에서 헤어나기 힘든 것도  하나의 증상이다. 회개하나 후로도 오래도록 양심이 당신을 괴롭힌다. 확신이 없다는 가장 확실한 증상은 메마른 기도생활일 것이다. 형들은 기도에 열심을 낼수는 있으나 그들이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에는 경이로움이나 경외심이나 친밀함이나 즐거움이 없다. 

목표지향적 대화, 몇몇 사적인 문제, 연인에게는 상대의 아름다움을 말해주는 대화- 간구;/자백/경배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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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종교적 도덕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진정한 기독교는 종교와는 전혀 다르다.' 복음과 종교적 도덕주의의 미세한 경계를 넘나들며 고민하는 이들에게 팀켈러는 희망적인 결론을 내는데, 결국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뉴턴의 또다른 찬송가

우리의 쾌락과 의무가 전에는 정반대였으나 아름다운 주를  뒤로 서로 하나가 되었도다:

종교적 건물에 머물지 못하고 영적유랑자가 되어버린 우리에게 주는 희망이자 경고스러운 글., 

 

덧. 팀 켈러, 한국에서 시기에 따라 많이 읽히는 저자들이 있는데 2010년대 전후 가장 주목받고 많이 번역된 작가인듯. 이런 주목의 시작은 리디머 교회의 성공도 있었겠지만,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으로 다가갈까를 고민한 흔적들 때문일거다. 정통적인 장로교의 보수적인 교리를 유지하면서도 도덕이나 윤리, 종교가 아닌 복음을 제시한다는 면에서 메가처치화 된 한국 교회에 주는 시사점도 많은 듯하다. 특히 여성안수나 동성애에 관련된 매우 정통적인 입장에 서 있는 듯. 역쉬 존 파이퍼랑 친하다고 하네.

덧2. 이 책에서 번역하기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제목이 아니었을까. 탕부하나님 정말 잘 안와닿는다. 그렇다고 딱히 대안적인 번역도 떠오르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