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좁은 일상_2

부족 /만족 /자족

유산균발효중 2015. 9. 9. 22:52

만삭의 예비엄마들에게 출산교육을 하는 그녀는 빠르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젊은 파리지엔 특유의 억양과 속도를 자랑했다. 아마 수십번 아니 수백번을 했을 그 수업을 반복하면서, 안그래도 사무적인 말투에 기계적인 태도가 더해졌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세상의 모든 마케팅에 저항하겠다는 의지만큼은 게을러지지 않았나보다. 이런저런 육아용품의 쓰임새와 필요를 묻는 질문에는 단호하고 분명하게, 혹은 친절하리만치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기의 사진을 레이블에 넣은 에비앙의 마케팅도, 모유가 아니면 죄책감을 선물하는 모유관련 용품시장의 마케팅에도, 이 물건이 없으면 발달에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는 광고들에 대해서도 꼭꼭 코멘트를 달았다. 그리고 '그거 아무 소용없는거 아시죠? 뭐, 하긴 엄마의 선택이니까 원하시면 사셔도 되긴하죠.'란 문장도 잊지 않았다. 

풍문으로 들리는 필수육아용품이 떡하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뭔가 준비를 잘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만족감. 가끔씩 이런 류의 뿌듯함이 찾아오면 뒷골이 오싹해지며 뭔가 섬뜩한데, 애를 키우는 과정에서는 오죽하랴. 생명자체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앗아가는 물질문화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린다.  

자족의 덕목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부족의 죄책감이나 만족의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즐겁게 자족을 누리는 방법이 부모가 되는 과정인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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