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un-frame

[워홀홀릭1]2007년 어느 날

유산균발효중 2010. 3. 25. 11:02

 

 

디 워홀에게 느낀 양가감정: 일상의 이면

2007.05.31

 

<앤디워홀 팩토리 전>은 앤디 워홀의 상업성과 대중성을 이용하여 워홀의 외형적인 화려함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앤디워홀의 전성기인 60년대의 작품에서부터 초기와 후기 그리고 영화까지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도 볼거리가 풍부한 전시였다.

“만일 당신이 앤디 워홀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나의 그림과 영화, 그리고 나의 표면만을 보십시오, 그곳에 내가 있습니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60년대 미국 소비문화의 발달과 미디어를 통하여 예술의 영역이 확장되었다면, 그 선두에는 워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워홀의 작품들 중 대중 스타를 소재로 한 그의 작품들에 특히 주목하였다. 외형적인 화려함의 이면에는 워홀의 말처럼 아무런 지시적인 의미도 함축되어있지 않은 것일까? 의미 있는 것 같으면서도 허무하고 상업적인 것 같으면서도 예술적이고, 이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감성적인 워홀의 일련의 작품들.

나의 이야기는 워홀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평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정말 동시대인의 취미를 대변하는 대중성을 가진 것인가? 이 평가는 워홀에 대한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상업성? 예술성?

워홀이 ‘마릴린’을 제작한 1960년대 초는 미국의 사회가 급격하게 변한 시기이다. 이러한 사회상은 워홀의 다른 작품에서도 나타난 일련의 소재들에 영향을 주었다. 예컨대 코카콜라 병, 캠벨 수프 깡통, 브릴로 박스 등은 미국의 일상적인 삶에서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상품으로 대중 소비사회의 일면을 상징한다. 팝아트는 미국적인 물질주의 문화의 반영이자 그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과도 연관되어있다. 2차 대전이후의 급속한 산업문명과 기술발달에 의한 대량생산, 기존사회 계층의 붕괴, 대중문화의 성장은 과거 추상미술이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팝아트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한 배경이 될 수 있다.

이제, 젊은이들은 대중 매체를 통해 쉽게 대중 스타들을 접할 수 있고, 이들에 대한 열광을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흔히들 워홀을 평가할 때 “순수예술과 대중문화의 이분법적 위계 구조를 와해함으로써 예술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이를 ‘마릴린’에 적용해본다면,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는 대중스타가 ‘고상한’ 미술관의 한 벽을 장식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예술의 영역의 확장보다는 60년대 자본의 동력학이 지니는 힘이 순수 예술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린 승리로 읽어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차이? 반복?

이 작품도 역시 워홀의 트레이드마크인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기계로 찍어낸 듯한 비개성적인 복제된 이미지들의 반복적 구성은 익숙한 이미지를 계속해서 재인식시키며, 화면의 깊이나 공간감, 거리등을 부정한다. 마릴린 먼로는 마치 어떤 광고의 한 조각처럼 어떠한 인간적인 따뜻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인격이 배제된 듯 보이는 마릴린 먼로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워홀의 실크스크린은 단순한 반복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작품은 오히려 그 거대함을 마주하고 가까이서 관찰하면 실크스크린의 바탕위로 안료를 통한 재질감이 드러난다. 또한 마릴린의 연작들의 각각의 이미지들은 하나도 중복됨이 없이 조금씩 다른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실 워홀은 이를 통해 단지 기계적인 복제품의 반복적 생산이 아니라 예술가의 손을 작품에서 배제시키지 않는 면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나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기계적인 반복의 익명성과 워홀이라는 작가의 ‘원작’인 마릴린을 만날 수 있다. 워홀은 반복을 통해서 오히려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성하고 있는 듯하다. 워홀을 섣불리 공장의 대량 생산과 결부시키려 하는 것은 말 그대로 기계적인 매치일 뿐이다.

<Marilyn Monroe 1967-Portfolio of 10>

**이미지의 허무함

대중적인 스타인 마릴린 먼로를 소재로 하였다는 점은 매스미디어의 위력이 선보여진 시기에 대중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리자로서의 스타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에게 남는 찝찝함은 이러한 대중스타의 출현이 단지 이면의 화려함만을 느끼게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 찝찝함의 일차적 이유는 그 소재로부터 기인한다. 워홀이 대중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다는 점이다. ‘대중’스타. 누구나 아는 사람에 대한 작품을 통해서... 그러나 오히려 일반인과 분리된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무한 반복은 오히려 ‘비’대중적이라고도 불릴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스타는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만 그들 고유의 가치를 지니는 존재이다. 즉, 실재가 아닌 이미지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중매체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대중 스타들의 화려함의 표면에는 사실 그것이 허구임을 드러내는 아이러니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워홀의 작품은 보드리야르가 말한 대로 실재의 자리에 가상이 들어선 세계로서 이는 현실을 보여주지 않으며, 원본과 복제의 지시 관계 사이의 균열이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워홀은 화려한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정말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 일까? 혹은 화려함으로 이미지의 허망함을 가리려 했던 것일까?

**삶과 죽음

이번 전시에서 특별히 재미있었던 점은 ‘죽음'이라는 테마에 관한 것이다. 마릴린’뿐 아니라 워홀이 전성기에 만든 작품들의 대상은 모두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마릴린의 자살 후에 그녀에 대한 작품을 만든 것이나. 케네디 암살이후 재클린을 담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상업적인 대중 예술이나 스타 시스템이 담아낼 수 없는 죽음의 이미지에 천착했다고 느껴진다. 마오의 초상화나 리즈의 미소, 그리고 그 자신의 자화상까지도 왠지 박제된 동물을 보는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죽음의 그림자’로 묶인 섹션에서, 60년대 죽음과 재난 연작의 작품들이나 70~80년대 칼, 망치, 총, 해골 등의 죽음과 공포를 연상시키는 대상으로 이어지는 작품들을 통해서 나름의 단서를 찾아내 본다.

워홀이 보여주려는 죽음은 그의 일련의 작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스 미디어를 거치면 그냥 일상의 자연스러움으로 녹아내릴 수 있는 것들이라는 점이 서글펐다. 그 자신 스스로도 마치 영정사진과 같은 자화상들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점, 스타라는 후광 뒤에 숨겨진 어두움에 대한 이야기 들은 워홀이 하고 싶었던 숨겨진 반쪽 자리 진실로서 자리매김한다. 스타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지만 그러면서도 철저히 자신을 은폐 하려고 하였던 점, 그 은폐의 핵심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였을까?

<Self-Portrait ,1986 > < Gun,1982>

**미술관을 벗어나서

팝 이전의 가진 미술가들의 아우라를 벗겨버리는 것으로 워홀의 작품은 시작된다. 동시에 그러한 아우라를 재확인 시켜주는 것으로 워홀의 작품은 끝난다.

일상으로 돌아가자면, 여기, 내 책상위의 먹다 남은 통조림 캔에도 특별한 것이 살아 숨쉬고 있다고 그는 이야기 한다. 혼자만의 우울한 저녁식사 뒤의 깡통이 예술적 고매함을 얻어 박물관의 벽에 걸린다면, 그 현대인의 우울은 하루아침에 예술적 가치로 변모되는 것이다. 대량 생산의 상품들이라는 물신 문화와 자본에 기대어 오로지‘소비’만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지을 수 있는 세대에 이것을 긍정하면서도 뛰어넘으려는 워홀의 노력은 동시대에 가장 인기를 누리는 예술가로 그를 위치 지웠다.

난 여전히 워홀에 대하여 섣불리 판단 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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