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para-screen

정기용_정재은 글

유산균발효중 2012. 6. 1. 08:32
건축가 정기용(66세)은 척박한 한국 건축문화의 문제점을 설파하고 이 땅에서 건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 한국 현대건축의 2세대에 속하는 대표적인 건축가인 그는 전북 무주에서 12년 동안 진행한 공공건축 프로젝트와 전국 6개 도시에 지은 어린이 도서관인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 등을 통해 건축의 사회적 양심과 공공성을 강조해왔다. 그는 언제나 열정적인 말로써 한국의 건축 제도를 개선하고 대안적인 건축 철학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 지식인이다. 또한 쓰레기를 양산하는 현대 건축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흙을 이용하는 건축 방법을 고민했다.
현재 정기용은 건강이 좋지 않다. 5년 전 설계차 들린 병원에서 대장암 판정을 받고 11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퇴원 후에도 일을 멈추지 않는다. 암치료의 부작용이 낳은 성대결절로 인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정기용. 말을 전하기 위해 마이크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 부산시 공무원들과 함께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를 답사하던 정기용은 무주 등나무 운동장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태양열 집열판이 설치된 것을 보고 불 같이 화를 낸다.
그러던 어느 날 정기용은 서울 광화문 일민 미술관으로부터 단독 건축전 개최를 제안 받는다. 정기용은 이 건축전을 준비하면서 평생에 걸쳐 쌓아온 성과물을 보다 폭넓은 대중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그러나 전시 준비 과정은 순탄하지가 않다. 일민미술관 측과 정기용의 전시 준비 팀은 전시 규모와 내용을 두고 갈등한다. 시간은 흐르고 정기용은 몰라볼 정도로 수척해진다. 죽음을 앞둔 정기용은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과 집들을 되돌아보면서,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나간다. <말하는 건축가>는 그의 마지막 전시 준비 과정을 축으로 그의 삶의 궤적, 그의 건축 철학과 작업,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 한 인간의 예민한 심리를 포착한다.
제작노트
[ ABOUT MOVIE ]


1. 대한민국 최초의 건축 다큐멘터리 탄생
한국에서 건축은 무엇이고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급속한 근대화와 세계화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의 도시 풍경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건축의 잘못된 위상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정부 주도의 관료주의적 국토 개발과 도시 건설, 거주와 삶이 아니라 투기와 재테크의 수단이 된 아파트의 난립, 공론이 상실된 재개발과 뉴타운 형성, 공권력과 도시 하층민의 대립 등은 한국의 도시와 건축을 이야기할 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테마였다. 이러한 사회 문제에 대해서 영화 역시 같은 주제와 쟁점으로 응답했다. 김동원 감독의 기념비적인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 이후 <호숫길> <용산 남일당 이야기> <마이 스윗 홈> <신봉리 우리집> 등 많은 독립 다큐멘터리들이 뉴타운과 재개발 건축으로 인한 갈등과 비극에 초점을 맞춰왔다. 극영화 부문에서 <파주> <비열한 거리> <1번가의 기적> <똥파리> 등도 비슷한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핵심적인 도시/농촌 공간의 형성과 건축 문화를 직접 이야기하는 영화적 다큐멘터리는 거의 없었다. <말하는 건축가>는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빈 틈을 개척하는, 건축과 건축가를 다룬 한국 최초의 극장용 건축 다큐멘터리다.


2. <울지마 톤즈>의 감동을 뛰어넘는 휴먼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는 또한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을 다룬 휴먼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영화는 대장암 판정을 받은 정기용의 마지막 1년 여의 시간을 함께 하면서, 죽음을 현실적으로 대면하며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의연한 태도를 담는다. 최근 사회적으로 ‘웰 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아픈 몸을 이끌고도 변함없는 자세로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정기용의 모습에서 우리는 삶과 실존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던지게 된다.
다가오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정기용의 모습은 큰 울림을 자아낸다. 그것은 ‘건축가’라는 특정 직업과는 상관 없이 삶과 죽음을 경험하는 인간 모두의 보편적인 실존에 관한 문제를 돌아보게 한다. <말하는 건축가>에서 정기용은 죽음과 대화하고 죽음과 공존하기를 꿈꾸며 누군가를 위하는 일, 사회가 원하는 일을 찾아 나선다.
영화에서 정기용은 지인을 위해 설계한 춘천의 ‘자두나무 집’을 10년 만에 방문한다. 딸의 죽음 이후 어디론가 숨어들고 싶어 하는 집주인을 위해 나지막한 마루를 만들어 논과 대지가 가까이 펼쳐지도록 하고, 한옥의 난반사 원리를 이용해 그녀의 상처 입은 마음을 빛으로 안온하게 감싸고 위로하려 한 공간이다. 마당에는 딸의 무덤과 성모 마리아 상을 놓아 죽음을 애도하도록 했다. 어쩌면 정기용이 다시 오지 못할 이 집은, 그가 곧 맞이하게 될 죽음을 예고하며 경건하고 숙연한 아우라를 뿜는다.
<말하는 건축가>는 삶의 공간을 창조하는 건축가의 마지막 시간들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본질에 집중하는 경건하고 감동적인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다.


3. 국내 최대 규모의 건축가 단독 개인전을 기록한 예술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는 또한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정기용 건축전 ‘감응: 정기용 건축’(2010.11.12-2011.1.30)의 준비 과정을 따라 잡는 예술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사실 한국에서 건축은 예술과 문화로 제도화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예술의 제도화 과정에서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데 반해, 국내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건축을 그 안으로 적극 끌어들이지 않았다. 국내 사립 미술관에서 건축가 개인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기는 일민미술관의 ‘감응’ 전이 처음이다.
<말하는 건축가>에서 정기용은 일민미술관의 전시 제안을 받은 뒤 전력을 다해 전시를 준비한다. 정기용은 그가 건축을 통해 평생에 걸쳐 추구했던 바를 보다 많은 대중과 직접 소통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는 해당 건축가가 더 많은 관객들을 만나고, 다수의 공중(公衆)이 단지 자본과 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단순한 건설 행위가 아니라 문화적 장치로서 예술의 한 분야로서 건축을 이해하게 하는 구체적인 실천 행위이다.
마침내 전시 개막일. 한국 건축계와 문화계의 많은 인사들이 일민미술관으로 모여든다. 유홍준, 김정헌, 도정일 등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지식인과 예술인들의 모습을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말하는 건축가>는 미술관과 큐레이터, 작가와 관람객이 하나의 전시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빚어내는 갈등과 소통, 상보와 이해의 역학관계를 세밀하게 포착하는 예술 다큐멘터리다.
<말하는 건축가>는 또한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와 건축평론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정기용과 한국의 건축에 대해 이야기한다. ‘빈자의 미학’이라는 건축 철학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지난해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아 대중들에게도 친숙한 건축가 승효상, 한국 현대건축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서울 선유도 공원을 설계했으며 정기용의 오랜 동료였던 건축가 조성룡, 현재 재건축되고 있는 서울 시청사의 설계자인 건축가 유걸 등을 영화에서 만나볼 수 있다.




[ HOT ISSUE ]



1. 무주 공공 프로젝트, 진정한 녹색성장이란 무엇인가?
정기용은 1996년부터 2008년까지 12년 동안 전북 무주군에서 4개의 면사무소(주민자치센터)와 공설운동장, 납골당, 버스정류장 등 30여 개의 공공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는 현대 한국 건축계에서 한 명의 건축가가 하나의 지역을 대상으로 진행한 공공건축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랜 시간을 들인 우리 건축계의 사건이었다.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건축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정기용은 급격하게 산업화된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점차 소멸해가는 농촌의 문제를 재고하고, 이 땅의 기후와 풍토와 풍경에 기반해 농촌 삶의 현실을 재해석하면서,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거주의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했다. 2010년 봄 정기용은 부산시 건축 공무원과 관계자들의 무주 건축 답사에 동행하면서 자신의 작업을 소개한다. 12년 간 이어진 이 프로젝트에서 정기용은 무주군에 거주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어떤 공간이 그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고 이를 건축 작업에 반영했다. 안성면 면사무소에는 주민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공중목욕탕을 만들고, 무주군수와 주민들이 바랐던 자연친화적인 감응의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공설운동장의 스탠드를 등나무로 감쌌다. 그런데 2년 만에 무주에 다시 내려온 그는 면사무소와 운동장에 태양열 집열판이 볼썽사납게 설치된 것을 발견하고 좌절한다. 관공서의 에너지 절약을 위해 태양열을 사용해야 한다는 정부 시책에 따라 실행된 것이지만, 이는 자연을 소외시킬 뿐 아니라 설계자인 정기용의 의도와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과연 진정한 ‘녹색성장’이란 무엇인가? 정기용은 자신도 모르게 망가져가고 있는 무주의 풍경에 실망한 채 발걸음을 돌린다.


2. 동대문 운동장 프로젝트,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지난 2007년 서울시는 민선4기 시정의 핵심과제로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을 본격 추진하기 위해 지명 초청 설계경기를 통해 설계자를 선정키로 하고 국내외 각 4명씩 저명한 건축가 총 8명을 선정했다. 외국 건축가로는 이라크 출신으로서 영국에서 활동중인 자하 하디드와 스페인 출신으로서 역시 런던에서 활동중인 FOA(Foreign Office Architects), 미국의 스티븐 홀 및 네덜란드의 MVRDV이며, 국내 건축가로는 유걸, 최문규, 조성룡 및 승효상이었다. 설계경기에 참가하게 된 조성룡은 친구인 정기용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들은 함께 설계경기에 참가했다. 동대문은 정기용에게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어린 시절을 동대문 한가운데서 보낸 정기용은 이 프로젝트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서울을 대표하는 역사와 문화의 중심공간이며 패션 산업의 메카인 동대문 일대를 크게 바꾸게 될 이 프로젝트의 결과는 모든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놀랍게도 자하 하디드의 설계안이 당선되었다. <말하는 건축가>는 이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던 정기용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또한 설계경기에 참가했던 국내 대표적인 건축가들인 승효상, 유걸, 조성룡의 인터뷰와 더불어 그들의 설계안도 영상에 담았다.
수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오는 7월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 디자인플라자가 공개된다. 서울시는 국제적인 스타 건축가의 건축 작업을 통해 동대문이 세계 디자인의 허브가 될 것이라며 환영했다. 정기용은 자하 하디드의 건축이 동대문 주변의 환경과 어울리지 않고 역사적인 공간을 파괴하는 형태 만능주의적 건축이라며 극도로 혐오한다. 동대문 프로젝트는 현재 우리의 건축 환경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국내 건축가의 부재, 서울 도심의 풍경과 개별 건축물의 관계 등의 숙제를 던지며 공개되는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 역사문화공원과 디자인플라자는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처럼 많은 관광객을 불러오는 서울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을까?


3.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이란 무엇인가?
정기용이 우리 건축계에서 자신의 활동의 방법론으로 삼은 것은 ‘말과 흙’으로 요약할 수 있다. 68혁명 직후 프랑스에 유학했던 그는 15년간의 파리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사회적 건축가’로서 말과 행동을 시작한다. 한국은 건축문화의 전통이 급속히 단절된 채 자본주의 근대화 과정을 경험했으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건축은 관료주의와 자본주의의 시장 논리에 복속하게 되었다. 정기용은 근대성, 언어와 소통, 공공성, 삶과 거주, 건축의 사회적 실천 문제를 누구보다 앞서서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긴 인물이었다. 1986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친 그는 민족건축협의회 회장을 맡았으며 동료 건축가들과 함께 한국 현대 건축의 브레인이자 심장부인 ‘서울건축학교(SA)’의 운영위원으로 일했다. 그는 개별적인 건축물 또는 건축 작품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건축을 매개로 학생과 일반인과 전문가 모두와 말하고 소통했던 것을 중시했던 인물이다. <사람 건축 도시> <서울 이야기> <감응의 건축> <기억의 풍경> 등 여러 권의 책도 출간했다. 삶과 사회와 건축에 대한 그의 관점이 녹아있는 이 사유의 결과물에서 그는 ‘우리’의 공동체적 가치를 회복하고 개발중심주의의 파괴와 건설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공간과 영역, 우리의 삶을 재창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말하는 건축가>에서도 정기용은 끊임없이 말한다. 그는 삶의 많은 시간들을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자신의 회사인 기용건축의 직원들과 회의하고, 공무원들에게 편지를 쓰고, 그가 설계하는 공간을 사용할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데 쏟았다. 그에게 있어서 말이란 인간의 삶을 이루는 근원적인 요소인 동시에, 개별 낱말을 재료로 삼아 하나의 사유의 건물을 짓는 건축적인 작업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말하는 건축가>는 일반적인 많은 건축 다큐멘터리와는 달리 정기용이 만든 건축물 자체를 단순히 소개하거나 홍보하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정기용의 끝없는 말과 글을 통해 그가 평생에 걸쳐 역설하고자 했던 가치에 귀를 기울이면서, 결국 그것이 한국 현대 건축의 문제와 역설에서 파생되어온 것이며, 결국은 한국 사회의 리얼리티를 반영하는 핵심적인 쟁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4. 기적의 도서관, 공공건축은 어떠해야 하는가?
현대 건축은 포스트 모더니즘과 더불어 점차 강력하고 스타일리시한 형태를 창조하는 데 골몰해 왔다. 건물이라기보다는 조각에 가까운, 시각적 충격을 주는 기념비적인 랜드마크를 설계하는 건축가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정기용의 건축은 진부하고 일상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정기용은 매혹적인 형태를 만들어 냄으로써 디자인 감각을 뽐내기보다, 해당 건축물이 지어지는 땅과 그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읽어내고 공간을 통해 사용자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방법을 택했다. 형태가 아니라 삶을 성찰하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건축을 통해 사회 관계를 만들어내는 공공적 서비스로서의 건축은 그가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 의해 망가지고 부서진 한국 사회를 치유하는 방식이었다. 순천, 진해, 제주, 서귀포, 정읍, 김해 등 여섯 곳에 어린이 도서관으로 지은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는 정기용이 추구했던 건축의 가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말하는 건축가>는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건축, 공공건축의 모범적 사례로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의 형성 과정을 소개한다. 그리고 단순히 형상의 미적 감수성을 강조하는 미학으로서의 건축이 아니라, 해당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들 모두의 삶의 질과 맞닿은 ‘윤리로서의 건축’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건축 재료의 측면에서, 정기용이 평생에 걸쳐 탐구하고자 했던 것은 흙이다. 그는 오직 흙으로 7천여 명이 거주할 마을을 만들어냈던 이집트 건축가 하싼 화티의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를 우리 말로 번역함으로써 건축에 있어서 흙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한국에서 근대화와 자본주의 도시 형성 과정, 그리고 그 건축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 우리 땅에 남아 있는 흙집과 담을 찾아 나섰으며, 살림집과 학교를 흙집으로 설계하고 만들어냈다. 정기용이 ‘흙건축의 대가’라 불리게 된 것은 그런 이유다. <말하는 건축가>에서 정기용은 무주 진도리 마을회관에서 흙건축을 설명하며 이를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로 이끌어낸다. “건축은 영원하지 않거든요. 어느 정도 쓰고 또 사라지고 새로 짓고. 근데 사라질 때 현대 건축의 문제는 그게 다 쓰레기가 된다는 거. 근데 흙건축은 사라질 때 깨끗하다. 왜? 그냥 흙으로 돌아가버리니깐. 어디로 가져갈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서 그냥 흙으로 돌아가 그런 깨끗한 죽음을 가지고 있다.” 정기용은 이제 자기 자신이 흙으로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흙은 건축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재료인 동시에, 인간이 죽음 이후에 돌아가게 되는, 삶의 근원적인 연장에 다름아니다.




[ PRODUCTION NOTE ]


정재은 감독이 직접 말하는 ‘정기용과 나’
1. 첫 만남
나는 오랫동안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간 내 영화에도 건축이나 도시 공간은 하나의 중요한 모티프였다. 2009년 서울에서 열린 건축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면서 건축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가운데, 주인공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을 접촉할까 알아보던 중 정기용 선생님을 추천 받고 그의 책인 <감응의 건축>을 읽은 뒤 무주 프로젝트를 둘러보러 갔다. 무주의 공공건축은 그간 내가 생각했던 건축과 매우 달랐다. 대개 멋있고 화려한 빌딩을 짓거나 유니크한 공간을 만드는 것을 건축이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의 작업은 좀 평범하고 보잘것없었다. 대체 이 건축가는 왜 이런 일을 그토록 열심히 했는가.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2009년 12월 말 처음 정기용 선생님을 만났다. 안국동의 선생님 단골집에 밥을 먹으러 가서 “이런저런 이유로 당신을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건축에 관심이 많고 건축가에 대한 다큐를 찍어보고 싶고 무주도 다녀왔는데 영화로 찍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선생님은 한참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네가 계속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냐, 그것 참 재미있겠다.” 그러면서 쉽게 오케이를 하셨다. 정기용 선생님은 어떤 기회든 건축가의 삶과 생각을 대중들과 일반인에게 전할 기회가 되면 마다 않고 실천하던 사람이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취재가 시작되었다. 두세 달 정도 매주 수요일에 선생님의 회사인 ‘기용건축’에 놀러 갔다. 선생님을 만나면 인터뷰를 시작했다. 한번에 한두 시간 정도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건축 경험도 이야기하고 했다.
어떤 소재와 주제로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건축 프로젝트를 택하고 싶었다. 한 사람의 건축가는 어떻게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건축을 완성해 나가는가? 처음 접한 것은 소격동 한옥 프로젝트였다. 오래된 소격동의 한옥을 리모델링하고 새로 재건축하는 작업에 정기용 선생님이 참여하게 되었다. 영화의 초반부에 나오는 조성룡 건축가와 정기용 선생님의 산책 장면이 바로 그 시기에 촬영한 것이다. 한데 두 번 정도 촬영했을 때 선생님이 말했다. “여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분관이 들어오는 자리 옆인데, 그러면 땅의 조건과 상황이 많이 바뀔 것이다. 그 이후에 이 한옥을 어떤 집으로 만들 것인가를 결정해도 될 거다.” 그러면서 이 프로젝트가 연기되었다. 애초의 내 의도대로 작품을 찍어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나와 선생님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2. 기용건축
서울 삼청동의 한 건물에 ‘조성룡도시건축’과 ‘기용건축’이 나란히 세 들어 있다. 기용건축은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설계사무소다. 적게는 10년, 많게는 30년씩 선생님과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기용건축을 유지하고 있다. 기용건축은 일반적인 커다란 설계사무소가 아니라 아뜰리에 스튜디오인 만큼 정기용 선생님을 중심으로 그의 건축세계를 흠모하는 젊은 친구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직원은 10여 명 정도였다. 정기용 선생님의 제자이면서 30년 가까이 함께 일해온 김병옥 소장(영화 속 대전청사 설계경기 작업 영상 자료에도 김병옥 소장이 등장한다), 무주 프로젝트만 십여 년 했던 한동훈 실장 등이 선생님의 팔다리가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서울 구로구 항동 아파트 프로젝트, 김해 기적의 도서관, 그리고 김해 故 노무현 대통령 추모관 등의 작업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기용건축에서 인상적인 것은 방대한 자료들이었다. 기용건축 지하 창고에 선생님이 1970년대부터 수십 년 동안 모아왔던 자료, 건축 도면, 사회 활동에 대한 보고서, 스케치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 가운데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을 선별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정리가 안 되어 있다. 일민미술관의 정기용 건축전 이후,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이 자료들을 아카이빙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최초로 건축 아카이빙 대상으로 선정한 건축가가 바로 정기용이다. 사실 나는 극영화만 만들다가 다큐멘터리 작업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시작 단계에서는 무엇을 찍어야 하는가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처음에는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면 찍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너무 촬영을 많이 못했다. 독립 다큐멘터리로 시작한 만큼 제작비가 없고 카메라를 아무리 싸게 빌려도 진행비에 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촬영을 많이 안 하면서 중요한 이벤트 중심으로 영화를 찍어나갔다. 2010년 초여름까지만 해도 영화의 메인 플롯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3. 무주
2010년 봄, 선생님이 부산시 공무원과 함께 무주 공공 프로젝트를 답사하는 프로그램에 가신다고 해서 함께 촬영을 갔다. 무주에 온 부산 공무원들을 선생님이 안내하는 과정을 찍었다. 그때 선생님은 건축가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설치된 안성면 사무소 태양열 집열판을 처음 발견하고 웃고 말았다. 하지만 등나무 운동장에도 태양열 집열판이 설치된 것을 보고는 격렬하게 화를 냈다. 그리고는 이후 답사 스케줄을 모두 접었다. 당시 나와 선생님의 관계가 많이 진전되었기 때문에 선생님한테 “화를 필요 이상으로 내시는 거 아니냐. 사람들도 많은데 그렇게 화를 내면 같이 간 사람들이 민망해 하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선생님께서 한참 생각하시더니 “그렇지. 아직은 이런 걸로 화를 내면 안 되지”라고 답했다. 몇 군데를 더 돌아다니셨지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셨다. 이 일은 인간이 자기의 화를 사람들 앞에 격렬하게 표현한다는 것에 대한 나의 시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적 맥락에서는 누군가 화가 나더라도 이를 감추어야 하는 것이 마땅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런 반응은 선생님의 멋있는 점이 아닌가 한다. 인간이 화를 내고 분노한다는 것, 정확히 자기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데, 그렇게 화를 낸다는 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만큼 자기가 한 것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깊다는 뜻이기도 하다. 격렬하게 자신의 감정과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선생님이 가진 가장 중요한 면모였다는 생각이 든다. 화를 내는 게 멋있을 수도 있다.
당시 부산시 공무원들의 답사에서는 무주 추모의 집, 부남면 천문대, 향토박물관 등을 함께 돌아보았다. 화가 많이 나신 선생님을 보내고 나서 따로 찍은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 무주 프로젝트에서 제일 좋았던 것은 ‘추모의 집’이었다. 이곳은 산꼭대기에 있는 납골당인데, 좀더 높이 올라가서 보면 한국의 산하와 자연을 전혀 거스르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한다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이 그 지역의 인삼밭을 모티브로 해서 마감한 지붕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나는 어디든 좋아하는 공간에 가면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추모의 집에서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따뜻한 휴식과 마음의 안정을 주는 공간. ‘추모의 집’이야말로 선생님을 많이 표현해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 실상사
2010년 초여름 어느 날 선생님이 촬영을 그만하면 어떻겠느냐고 얘기했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너무 건강이 안 좋다, 대장암 수술을 한 지 5년이 되었는데, 보통 환자들은 5년째에 완쾌하거나 병이 더 깊어지는데 내 상태가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 영화를 같이 하다가 상태가 더 나빠지면 어떻게 하냐, 그만하면 어떠냐”고 했다. 그때 난 “그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어요”라고 얘기했다. “선생님의 건강이 더 나빠질 수도 있지만 그것도 영화의 과정이고 만일 영화가 완성된다면 그것도 포용해서 영화를 찍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지리산 실상사를 리모델링하기로 했는데 그걸 찍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실상사를 취재하고 불교 건축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왜 사찰 건축은 현대화가 되지 않았는가. 절이라는 게 결국 일반 대중들에게 어떤 공간이 되어야 하는가를 공부하면서 실상사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상사에서는 ‘100년 내다보는 불사(불교건축을 불사라고 한다)를 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늘 세미나가 열렸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김봉렬 교수, 조성룡 건축가, 불교건축의 거두들이 세미나를 계속하면서 몇 개월을 세미나만 계속 찍었다. 이래서야 언제 건축 다큐멘터리를 만드나 회의에 빠져 있었는데,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5. 기적의 도서관
그 즈음 일민미술관에서 선생님에게 건축전을 제안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실상사 세미나 촬영에 다소 지쳐 있었던 나는 “좀 찍을 게 생기네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나서 전시회 준비 과정을 찍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그간의 건축전이 다소 딱딱하고 일반인이 알지 못하는 개념들만 나열했던 게 안타깝다. 전시 공간이 어떻게 쓰이는지, 좀더 대중적으로 다가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건축전에 사용할 영상을 만들어달라고 제안을 하셨다. 그래서 기적의 도서관을 찍겠다고 했다.
전국의 기적의 도서관 6개를 2주에 걸쳐서 촬영을 하러 다녔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먼저 정읍, 순천, 진해, 김해에 갔고, 맨 마지막에 제주와 서귀포에 갔다. 촬영을 다니면서 기적의 도서관이 참 찍기 어려운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도서관 건물 하나에 공간들이 너무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었다. 밖에서 볼 때는 뭔지 상상하기 어렵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매우 아기자기 했다. 아이들이 곳곳에 숨어서 책을 볼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배려한 흔적이 있었다. 기적의 도서관 촬영을 다니면서 아이들이 조용히 책을 읽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고작 대여섯 살 되는 아이들이 혼자 와서 책을 빌려서 편하게 양말을 벗고 눕거나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게 아닌가. 도서관이라는 게 이런 공간일 수 있구나. 칸막이를 사이에 둔 책상의 나열이 아니라, 아이들이 마음껏 책을 꺼내볼 수 있도록 하고, 또 아이들과 엄마들을 위한 배려가 반영된 이 공간이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기용이 시민단체인 ‘책 읽는 사회만들기 국민운동본부(책사회)’와 함께 만든 전국의 기적의 도서관들은 나에게 건축이 어떻게 사람들의 모습과 일상을 바꿀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6. 건축가의 집
선생님이 쓴 글 중에 ‘나의 집은 백만 평’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건축가는 어떤 집에서 살까>(2005)라는 단행본에 수록된 글이다.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십여 명의 건축가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해서 설명한 글을 모은 책이다. 다른 건축가들은 자기가 사는 집, 지은 집에 대해 꽤 멋있게 설명을 해놓았다. 그 글들을 읽으며 ‘건축가들은 다 이런 집에 사는구나’ 했다. 한데 정기용 선생님은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집은 백만 평’이라는 제목 그대로, 집은 단지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생활 반경 모두가 내 집이라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산책하는 곳, 내가 집에 들어올 때 걸어가는 골목, 이 모든 것이 나의 집이다, 집을 이렇게 확장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은 연립 빌라에 단촐한 방 한 칸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 글을 통해 선생님이 어떤 집에 사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 다가구 주택에 살던 선생님의 집을 직접 방문하게 된 것은 일민미술관 전시회 준비 과정을 찍을 때였다. 그때 그 집을 보고 느낀 것은 바로 ‘의식의 자유’ 였다. 열 평짜리 집에 월세를 살아도 집에 대한 사고를 저렇게 함으로써 어떤 자유로움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집에 대해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갖는 ‘소유’라는 개념을 떠나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내 집은 백만 평이라는 뻥 같은 말에 대해서 이 사람은 생각을 끝까지 하는 사람, 의식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7. 일민미술관 건축전
일민미술관 건축전 준비 과정에서는 정기용 선생님과 전시 준비팀이 회의하는 모습을 많이 찍었다. 일민미술관과의 첫 회의 자리, 전시를 기획한 강성원 큐레이터가 등장했을 때 제작진은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영화에 갈등이 시작되고 악역이 나타난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대부분 정기용 선생님을 경청했던 반면, 강성원 큐레이터는 선생님의 말을 잘랐다. 강 큐레이터는 정기용 선생님에 대한 애정이 깊은 만큼 전시회를 제안했지만, 선생님의 이야기를 과감히 자르거나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에 선생님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정기용 선생님과 강성원 큐레이터의 갈등, 전시를 준비하는 작가와 큐레이터라면 어디서나 생길 수 있는 보편적인 갈등의 축이 형성되었다.
첫 번째 갈등은 전시 규모와 관련된 것이었다. 애초 일민에서는 선생님의 스케치만 가지고 2층 공간 한 층 정도로만 전시를 하는 것을 제안했었다. 결국 전시 내용을 정리하면서 미술관의 1-3층 전시 공간 모두를 망라하는, 일민 측에서도 역대 최대 규모의 전시로 내용이 확장되었다. 이어 각 층에 선생님의 작업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무주 프로젝트와 기적의 도서관을 각각 한 파트로 다루고, 관련 영상과 흙담도 설치하며, 나무와 돌 등 선생님의 수집품도 전시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덧 이 전시는 건축가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정기용 선생님의 회고전 형식으로 변화되었다. 전시 과정에서 정기용 선생님은 모든 것을 다 넣기를 원했고 꼭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과 사무실에서 온 어마어마한 자료 가운데 큐레이터가 선별하는 게 어려웠던 전시였다.
두 번째 갈등은 전시 구역 중 서울관을 폐쇄하는 문제였다. 정기용 선생님은 오랫동안 도시 문제에 대해 많은 글을 쓰고, 사대문 안의 ‘문화도시 서울’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서울의 새로운 모습을 구상했다. 이러한 선생님의 작업은 하나의 파트를 이뤄 애초 전시 내용에 포함되어 있었다. 전시 공간에 서울관을 따로 만들어 사대문을 실제로 구현하고, 그 안에 문화도시에 대한 선생님의 구상을 설치하는 작업을 하기로 결정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산도 많이 들고 선생님이 구체적인 아트웍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그사이 선생님의 건강은 몹시 안 좋아지셨고 계속 입원과 퇴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는 중이었기에 쉽지 않았다. 결국 일민 측은 서울관 폐쇄를 주장했고, 선생님은 무척 아쉬워했다.
일민미술관 정기용 건축전은 2010년 11월 11일, G20 정상회담이 개최되던 날 개막했다. 제목은 “감응: 풍토, 풍경과의 대화”로 결정되었다. 국내 단일 건축전으로는 거의 최대 규모였고,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전시는 여러 모로 뜻 깊었다.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이런 건축전이 열린다는 것, 전시의 구성이 전문가 집단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향하고 있다는 것, 다른 건축전과 달리 영상 설치, 애니메이션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것 등이 화제가 되었다. 대중들의 근접도가 높은 공간에서 무료로 열린 전시라는 점도 성공의 한 요인이었다. 덕분에 무려 1만 명이라는 많은 수의 관람객들이 전시에 다녀갔다.
전시 오프닝 행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정기용 선생님의 강연이었다. 오프닝 마지막 순서로 약 30분 정도 선생님의 마지막 대중 강연이 있었다. 사람들은 정기용 선생님의 수척하고 야윈 모습에 너무 충격을 받았다. 때문에 강연의 분위기는 숙연했고 많은 이들이 울면서 강연을 들었다. “문제도 이 땅에 있고 해법도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에게 있다.” 선생님은 자신이 평생 이야기해왔던 것을 다시 한번 요약해 청중들에게 들려주었다. 한국에서 왜 건축가들이 이렇게 무시 당하는가, 왜 한국에서는 건축이 문화가 아니고 건설 토목인가, 우리가 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을 온 힘을 다해 역설했다.


8. 자두나무집
일민미술관 전시회 오프닝이 있기 얼마 전, 선생님과 함께 춘천 자두나무집에 다녀왔다. 나는 선생님이 설계한 건물 가운데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하시는 곳을 촬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얼마 후 선생님이 자두나무집에 갈 일이 생겼다고 했다. 완공된 지 10년이 지난 집을 고칠 일이 생겨서 건축주가 선생님한테 연락을 해왔다. 그 집의 주인은 정상명 화가다. 평범한 가정주부이자 화가였던 그는 딸을 잃은 뒤 생명 평화 운동을 하게 되었다. 정기용 선생님은 자신의 건축 중 자두나무집을 가장 좋아하고, 꼭 다시 가보고 싶다고 했다. 집을 멋있게 지었기 때문에 좋아했던 건 아니고, 주인이 좋은 사람이고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이어서 좋아했던 것 같다.
그날 날씨가 정말 좋았다. 완연한 늦가을이었다. 출발할 때 선생님은 다소 지친 상태였다. 그러나 자두나무집에 도착하자 기분이 좋아지셨다. 날씨도 좋고 주인도 집을 예쁘게 관리했고 자연도 햇빛도 너무 좋았다. 선생님은 거실에서 보면 논이 사계절 바뀌는 풍경이 되기를 원해 만든 집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건축가들이 그렇듯 선생님도 누군가의 집을 설계할 때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꿈꾸며 설계했을 거다. 선생님은 황금빛 들판을 상상하긴 했지만 막상 그걸 직접 본 것은 처음이라며 굉장히 행복해하셨다. “내가 이 집에서 몇 달 만 쉴 수 있다면 병이 다 나을 텐데.” ‘나의 집은 백만 평’이라며 의식적으로는 자유로웠지만, 정작 선생님은 자신의 몸을 누일 편안한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자두나무집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타인들을 위해 집을 지었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집을 짓는 건축가는 얼마나 될까?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자두나무집을 보며 사실은 정기용이 굉장히 숨어있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 마지막 봄나들이
2011년 초, 일민미술관 전시를 마치고 선생님 건강이 더 안 좋아졌다. 나는 선생님이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빨리 편집을 해서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었다. 매일 8-10시간씩 편집에 매달렸다. 타계 1주일 전인 2011년 3월 5일. 선생님이 갑자기 기용건축 직원들을 불러 모으셨다. “내가 오늘 기용건축 직원들과 함께 갈 데가 있다.” 선생님이 갑자기 봄나들이를 가고 싶어했고, 기용건축 직원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치료를 할 수 없다고 했고, 명륜동 집에서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앰뷸런스를 대절해서 경기도 광주 아천동으로 갔다. 나는 그때 촬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촬영자를 섭외할 시간도 없었다. 결국 가지고 있었던 아이폰으로 촬영한 것이 영화에 쓰이게 되었다. 유독 봄을 좋아하셨던 정기용 선생님다운 나들이였다. 이 장면을 촬영하며 나는 세상에 과연 이런 장면을 창조할 수 있는 캐릭터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했다. 이 장면이야말로 진정 내가 쓸 수 없는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정기용만이 창조할 수 있는 장면이구나 라고.
누가 수십 년간 함께 일한 직원들을 이끌고 침상에 누워 하늘과 바람과 나무에 고마움을 표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건 건축가 정기용이 우리모두에게 남기는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즈음 나는 영화에 내레이션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직접 화자가 되는 건 안 좋겠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해설 없이, 감독의 주관을 너무 드러내지 않고 그의 삶을 지켜보는 영화를 만들자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건축가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 사람에 대한 해설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해서 인터뷰 촬영을 하고 있었다. 3월 11일 건축비평가를 인터뷰 하던 도중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왠지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서 선생님 댁으로 달려가서 선생님의 죽음을 눈으로 보았다. 정말 많이 슬펐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다 보니 굉장히 밀도 있고 특별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스타일리시한 건축다큐멘터리를 촬영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한 건축가의 마지막 여정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가 되어버렸다. 다큐멘터리의 시작과 끝이 전혀 다른 곳에 와있었다.
승효상 건축가가 장례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소박하고 조촐하게 장례식을 하자고 했다. 너무 크게 하지 말고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소박하고 작게 하자. 혜화동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영결식을 한 뒤 선생님은 모란공원에 안치되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병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 적이 없었다. 나는 병원에 가서 영양주사를 맞고 쉬었었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 나중에 사모님에게 정기용 선생님이 어떻게 투병 중이었는지를 자세하게 듣게 되었고 많이 괴로웠다. 과연 육체적인 극심한 고통 속에서 그는 어떻게 그렇게 계속 일할 수 있었는가? 원래 선생님이 당뇨가 오랫동안 있었다. 2005년 8월 대장암이 발견되어 3개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았다. 수술을 받고 대장을 잘라내고 항암치료를 1년 6개월 동안 했다. 2007년 2월에 암이 간으로 전이 되었고 이어 폐로 전이 되어 수술하고, 그 다음 다시 간 수술을 했다. 영화를 찍기 전인 2010년에는 복수에 물이 차기 시작했고, 허리에 복수를 빼는 장치를 차고 다녔다. 2008년 겨울에는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성대결절이 와서 마이크를 해야만 말소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선생님은 지난한 투병 과정에서 죽음을 피해 요양을 간 적이 없었다. 수술을 하고 나서 또 일을 하는 등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첫 항암치료를 받은 2006년부터 총 여섯 권의 책을 정리해 냈고, 다큐멘터리를 위해 일하고, 일민 전시회도 치르고, 본인의 작품집도 정리했다. 정기용 선생님은 자기가 사회에 남길 수 있는 모든 말과 생각과 스스로가 생각하는 한국사회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돌아가신 거다. 투병 과정에서 이렇게 많은 작업을 하고 생산성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정기용 선생님은 너무너무 강한 사람이었다. 한번도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곧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고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만큼 다차원적인 흔적을 남기고 간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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