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우뚱 묵상

계시

유산균발효중 2011. 10. 22. 00:47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며, 맥체인 다니엘 본문의 병행구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오버랩은 요즘 내가 고민하고 기도하던 부분에 대한 응답,
하나님이 언약백성을 어떤 방식으로 인도하시는지 조금 이해하고 조금 더 기대하게 해 주었다. 


#1. 인생의 황금기를 포로로 종으로 보내는 두 청년.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의 말씀을 신실하게 성취하고 계시며, 그래서 그 시간을 '낭비'라고 말할 수 없다.
세상의 방식과 논리에 매여있는 것 같고 발목잡힌 것 같은 시간에도 여전히 흐르는 섭리.



#2.꿈은 꾸지만 해석할 수 없는 이 세대. 

   "꿈을 해몽할 사람이 없다."(창 40: 8)
   "그들은 그 꿈을 해몽해 주지 못하였다."(다니엘 4장 곳곳에 반복)

-창세기에서 애굽의 왕은 자신의 꿈을 해몽할 주술가들과 점성가들을 불러들이지만 아무도 해몽할 수 없었다. 
-다니엘서에서는 느부갓네살의 꿈 뿐 아니라 벨사살이 본 멸망에 관한 환상과 다리우스와 고레스 시기의 환상에까지 누구도 해석해내지 못하는 꿈과 계시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아무도 해석할 수 없었다. 

: 오로지 참되게 꿈을 해석하는 이는 하나님의 백성밖에 없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요셉: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니 나에게 이르소서.
-다니엘은 2장에서 지혜와 권능의 하나님을 찬송한다. 지혜자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사람들에게 지식을 주시며, 심오한 것과 비밀을 드러내시고, 어둠속에 감추어진 것도 아신다는 고백.


#3. 각각 꿈이 두번씩 반복되며 확증됨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명확하며 꼭 성취될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계시는 모호하지 않으며, 너무나 선명하고 분명하다.
막연하게 긍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분명한 심판의 내용을 전달한다. 



#4. '말씀에 헌신된 자'를 통해 그 뜻을 알리고 보여주신단다.

요셉이나 다니엘을 두고 얼마나 많은 학습법과 고지론이 등장하였던가.
성경을 조금만 자세히보면 웃기고 시시하지조차 않은 적용임을 알 수 있는데..

요셉의 11년동안의 종살이와 옥살이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게다가 다니엘이 뿅하고 그런 사람이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뒤 본문에 등장하는데,
9장에 보면 이해하지 못하는 환상을 본 다니엘이 금식하며 베옷을 걸치고 재를 깔고 앉아 기도하며 간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많은 이들의 비난과 참소(요셉의 경우 형들로부터 시작해 보디발의 아내, 헤세드를 배풀었지만 요셉을 잊고마는 술맡은 관원장까지, 다니엘의 경우 비방하는 주술사들, 왕의 신상에게 절해야하는 사회의 법과 제도 등)에도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자신의 뜻을 보이고 알리신다. 

사람을 참아내는 법, 환경을 견디는 법을 통해 인생의 헛됨과 하나님의 참됨이 요셉과 다니엘 개인의 영역 뿐 아니라
그 민족과 나라 전체에까지 드러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뿐이다.




p.s. 요즘 논문 글만 썼더니 내 손에서 나오는 글이 뭔가 어색하고 딱딱하다. 딱딱한 분위기를 무마하고자, 포스팅정리하다 생각나서 그림이나 한장 붙여야겠다.

렘브란트가 그린 <벨사살의 연회>, 1635년 작. 저 살아있는 표정들을 보라.




 안드레아 셀레스티란 사람이 한 세대쯤 뒤에 그린 꽤 낭만주의적 경향이 강한 <벨사살의 연회>,1705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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