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un-frame

[이순종 작품론_2008.01.04]

유산균발효중 2008. 1. 9. 10:00

에로스의 이중 구조

미학_이연호

이순종의 예술가적 노정은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 이야기를 연상하게 한다. 에로스(Eros)는 거칠고 궁핍한 어머니와 풍요롭고 아름다운 아버지를 닮았으며,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죽음과 삶의 중간적인 존재이자 지혜와 무지의 중간자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사랑을 갈망하고 지혜를 추구하는 근원이다. 이순종의 <팬티스타킹, 식기, 쌀과 머리카락 그리고 손톱>은 에로스가 그러하듯, 물질적이자 정신적이다. 작품 앞에 처음 선 관객은 젊은 여성의 도발적인 히스테리를 대면하고 섬뜩함을 느끼지만, 곧 작가의 몸에 익은 서정성과 노련함에서 배어나오는 은은함에 휩싸인다.

작가 이순종은 다양한 매체와 독특한 재료로 변화의 미에 몸을 싣는다. 90년대 중반에 사용한 군대 이미지에서부터 머리카락으로 그린 사군자, 다양하게 변형된 미인도를 거쳐 광고 매체에 나오는 여성이나 음식을 이용한 설치작업에 이르기까지 미적 영역은 실로 광범위하다. 모든 작업의 내부에는 작가가 줄곧 던져온 삶에 대한 일관된 질문들이 녹아있다. 물질을 통해 드러나는 비물질성, 여성적 삶의 공간과 정체성, 세속과 성스러움, 섹슈얼리티, 남성과 여성의 결합, 나아가 존재의 시작이 되는 에로스에 대한 성찰이 소리없는 협주곡을 만든다.

이순종은 일상적 사물들을 생경하게 배치하여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호기심을 유발한다. 삶의 자취를 머금고 있는 조악한 재료들은 다분히 여성적인 경험을 상징한다. <팬티스타킹, 식기, 쌀과 머리카락 그리고 손톱>,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재료들은 정제되지 않은 여성의 삶을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표면화한다. 새하얀 쌀을 담고 스타킹을 신은 국자, 시커먼 머리카락을 담은 체, 뾰족한 손톱을 박은 조리 기구에서 관객은 억압에 대한 작가의 항변과 분출을 경험한다. 여성의 삶이 응축된 공간인 주방에서, 작가는 조리기구들을 꺼내든다. ‘나의 삶’이 아닌 ‘남편의 삶’, ‘자식의 삶’, ‘부모의 삶’을 대신 살아야 하는 가부장제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것은 오로지 주방기구들 뿐이다. 일련의 둥근 기구들은 쌀과 머리카락, 손톱과 같은 또 다른 무언가를 다소곳하게 담아 스타킹에 싸여 허공에 매달려있다. 그녀는 강제로 주어진 모든 것들을 조용히 쓸어 담아 침묵을 유지한다. 스타킹은 ‘바람직한 여성상’으로 그녀를 완성하며 아름다움의 기준을 인공적으로 보충해준다. 흉측한 검은 실로 얼기설기 꿰맨 음부는 어떠한 항변도 허용되지 않음을 보여주며, 평온해 보이는 외형의 곳곳은 손톱으로 할퀴어지고 구멍나있다. 이처럼 작가는 히스테릭하고 페티쉬적이기까지 한 물질들을 통해 침묵 속에 숨겨진 격동을 재현하려는 비물질적인 의도를 함축하고 있다.

이순종은 여성적 공간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작품의 상징들은 여성성을 대변하는 만큼 남성성을 전제한다. 여성의 그릇 안에 들어간 하얗게 담긴 쌀을 통해서는 남성의 정자를, 천장에 둥글고 길게 매달린 스타킹의 외형을 통해서는 남성의 성기를 형상화한다. 남녀의 성교를 연상시키는 쌀을 담은 국자는 격동이 아닌 제의적인 엄숙함을 통해 억압된 성욕의 표출과 해방의 기로에 놓는다. 한편 검은 음모와 팬티스타킹은 여성의 음부를 자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남성의 시선에 의해 객체로만 머물지 않는 당당한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며 억압을 뛰어넘는 에너지를 보여준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양성(兩性)이 충동하며 어느 하나로 귀착되지 않는 그 지점에서 관객은 에로스를 만난다. 이순종에게 에로스는 성적 욕망이나 자기 보존 본능이라는 생의 본능일 뿐 아니라 자신의 불완전함을 자각하고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나약한 인간의 끊임없는 사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정점에서 얼기설기 뚫린 구멍사이로 피어있는 한 송이 연꽃을 볼 수 있다. 매달린 스타킹의 흔들림과는 달리 작가가 던진 최초의 질문은 허공을 떠돌지 않는다는 것을 구멍을 비집고 나온 연꽃의 생명력을 통해 볼 수 있다. 절망의 시작인 것 같았던 곳에서 아름다움이 탄생하고 있는 것을 관객은 목도한다. 여기서도 여전히 이순종은 세속 혹은 성스러움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이중성의 화음을 빚어낸다. 진흙과 억압의 세속에서 애잔하고 단아한 성스러움이 피어오르는 듯.

이순종의 작품은 자기 성찰을 관통하며 우회와 대면한다. 그녀가 겪어온 사회적 가정이라는 굴레의 압력과 여성이 느끼는 성적인 억압, 나아가 인간 개체가 겪는 외부와의 갈등은 섬세한 감수성으로 작품 안에 녹아있다. 이렇듯 작가는 어설픈 바느질 안으로 드러나는 섬세한 섹슈얼리티, 자아와 세계 간에 끊임없는 긴장, 스타킹의 세속에 연꽃처럼 피어나는 성스러움, 여성성과 남성성의 충동이 만들어낸 에로스의 이중적인 요소들을 직시하라고 요구한다. 이번 <Eroticism21c> 전시에서 작가는 자신의 세대가 가진 억압과 욕망을 에로스의 이중적인 구조를 통해 드러내고 있으며, 이 향연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날카롭고 생명력 있는 여성적 정체성과 삶을 관조하는 작가의 여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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