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para-screen

[무산일기]

유산균발효중 2011. 5. 21. 23:25
마음이 스산하다.
특별한 음악이나 카메라의 기교 없이 그렇게 끝나버린 마지막 롱테이크 5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개봉일부터 보려고 찜해두었던 영화를 이제서야 보게되었다. 덤으로 감독과 배우들까지 보았다. 하지만 영화에 너무 몰입되었던 나머지 그들을 마주하며 웃는얼굴로 인사하는게 힘들었다.

이창동의 연출부였던 이력 탓인지, 신인감독치고는 너무 섬세한 연출을 보여준다. (이창동의 전작들에서 보여준 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오아시스, 종교와 인간의 진정성에 관한 이야기-밀양: 등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은 그리 새롭지 않은 이야기였음에도 자연스러운 연출과 소박한 소재를 통해 뛰어나게 마름질하였다.) 올해 본 한국 영화중에 단연 최고였다. 
때론 조금 이야기가 조금 넘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승철의 일상이 세밀하게 다가온다. 





1. 무산일기가 다루는 사회

사회의 주변인을 다루는 대부분의 소설과 영화들은 어쩔수 없이 그들을 또다시 소외시키고 관찰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거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게 만든다. 이는 흡사 승철이 새터민을 도와주는 형사와 함께 교회에 가서 자신의 과거를 공개했을때, 숙영이 그에게 미안해하며 적극적으로 그를 도와주고자 하는 장면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승철이 교회에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승철의 뒷모습만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카메라의 위치. 딱 그만큼의 관심.)
숙영의 모습이 어쩌면 새터민에대한 사회 일반 혹은 교회의 시선이었다면, 
이 영화는 철저하게 탈북자의 모습을 단순히 남한사회의 소외계층이나 주변인이라는 이중적 틀로 관찰하는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터민 집단 안에서의 소외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외라는 한 단계 더 나아간 수준의 논의를 보여준다.


새터민들 사이에  벌어지는 사기와 불신, 시급 5천원짜리 일을 하는 친구들에 대한 비난
경철과 승철은 새터민 집단의 극단적 두 캐릭터를 형상화하고 있다. 
승철의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할 수 있습니다"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사회.
전단지 붙이는 일로 하루하루를 먹고 살지만, 남의 구역을 침범하면 안되고, 응징과 폭력이 난무한 전단지 사회에서 살아남기조차 어려운일.


2. 무산일기가 다루는 인간

여기에서는 누구도 일방적 피해자나 가해자가 아니다. 


전형적인 교회인으로 그려지는 숙영은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밤에 노래방을 운영한다. 그것도 도우미들이 룸서비스를 하는 노래방이다.
승철이 자신의 교회를 다니는 것을 알게 된 숙영은 교회에서는 아는척 하지 말아달라며 함께 기도하자고 한다. 
노래방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승철과 함께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부르는 것을 보고 화를 낸다. 
자신의 신앙과 일상의 괴리감을 느끼며 피해의식도 지닌 그녀는 사심없이 노래방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그를 이해할 수 없어한다. 마치 자신의 고결한 신앙이 그에 의해 침해받았다는 듯이 그를 쫓아낸다. 
교회는 그에게 외적으로 친절하지만 누구도 그와 친구가 되어주진 않는다. 
여전히 교회에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경철은 빠릿하게 남한의 생리를 잘 파악하여 다른 이들에 비해 안정적인 생활을 한다. 새터민 사회에서 배신자이자 사기꾼이지만 그 역시 피해자이다. 친구들의 돈을 사기친 경철. 
그런 경철을 누구보다 혐오했던 승철은 결국 그의 돈으로 그럴듯한 양복을 사고, 보란듯 숙영 앞에 나타난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경철을 피해 버스 안에서 몸을 낮추고 백구를 꼭 끌어안은 승철의 모습은 누구도 자본이라는 사회 구조 속에서 안전하고 정의롭기만 할 수 없다는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다. 


3. 무산일기가 다루는 관계

전단지를 붙이는 깡패들이 승철의 나이키 점퍼를 칼로 도려내 안에 있는 털이 모두 날리는 장면은
피부에 칼을 대어 피가 터지는 장면보다 더 슬프다. 
후반부에 승철이 그들에게 복수하는 장면은 섬뜩하기까지 한데, 승철이 그들에게 당할때 느낀 분노를 모두 압축해서 보여준다.
카메라는 줄곧 먼발치에서 감정없는 소리만으로 이 장면을 담아낸다. 

이 영화의 가장 애뜻한 관계는 승철과 백구의 관계이다.
승철의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백구이다. 백구는 정말 연기를 잘한다. ㅋㅋㅋㅋ
3만원짜리 백구는 애견센터에서 믹스견(ㅋㅋ)이라는 이유로 만원도 받지 못한다. 
새터민들이 시급 얼마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듯, 백구 역시 다른 이들에게는 귀찮고 냄새나는 개일 뿐이다. 
그러나 승철에게는 백구만이 유일하게 서로를 보호해주는 친구이다. 



4. 감독이 직접 만나고 들었던 자신의 친구를 그린 이야기라서 그런지 승철에 대한 그의 애정과 아픔이 드러난다. 
그래서 어떠한 극적인 눈물이나 감정을 끌어내려하지 않아도 마음이 시리고 아프다. 
이 시대에 우리는 누구의 친구가 되어야 할지, 어떻게 인간을 대해야할지 생각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