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클 분미’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 “영화적 혁신? 어려운 게 아니다”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이하 CinDi)를 비롯해 공식 일정이 상당히 빠듯하다. 지난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후 무엇이 바뀌었나?
원래 워커홀릭이다. 일하는 걸 참 좋아한다. 5월에 수상한 이후에는 일종의 적응 기간이었던 것 같다. 올해 말까지 외국 매체들을 계속 만나야 하거든. 그래도 황금종려상 수상이 두 가지 면에서 흥미로운 상황을 만들어줬다.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내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계속 받을 수 있다는 점. 근데 마음은 조급한 거지. ‘아, 난 일해야 하는데’라며 초조해 하고 있다.(웃음) 태국에 있는 집과 개들도 너무 그립다. 고작 사흘 정도 집에 머물렀다. 외국으로 이동해야 하는 일정이라 개들을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한다. 아마도 내년이 되기까진 계속 그렇겠지.
-<엉클 분미>는 ‘프리미티브 프로젝트’(The Primitive Project)의 일환이라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젝트인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태국 북동부 지역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한 예술적 프로젝트다. 단편 <엉클 분미께 보내는 편지>와 여러 영상 작품이 여기에 포함된다. 카메라를 싣고 이 지역의 부근을 돌다가 한 작은 마을에 정착하게 됐다. 사회주의 정부가 잔인한 폭력을 행사했던 곳이다. 군인들이 강간과 살인을 예사로 자행하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짓이지. 영화감독이 되고 나서는 항상 방콕에서 일했기 때문에 고향 지역을 돌아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찬찬히 탐구해 볼 수 있었다. <엉클 분미>에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내러티브로 삽입하진 않았지만, 촬영에 참여한 10대들과 함께 당시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작업했다.
-초기작은 대부분 혼자 작업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10대들과의 작업은 무엇이 다르던가?
여러모로 영향을 받았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는 거의 나 자신의 기억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사람의 기억을 듣고, 그걸 내 것으로 만들고 영화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일종의 ‘공유’ 과정인 셈이다. 몇 달 동안 작업에 대한 대화도 많이 나눴다. 글을 쓰듯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애쓴 것은 아니지만, 그 대화의 결과물이 영화 곳곳에 스며들었다고 생각한다.
-<엉클 분미>의 크레딧을 보니 원작자가 있더라.
<열대병>을 찍던 도중 고향 근처 수도원의 한 스님에게서 <전생을 기억하는 남자>(A Man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라는 책을 받았다. 스님이 자신의 전생을 적어나간 책이었다. 유령이나 버팔로였던 전생의 기억이 쭉 펼쳐지는 거지. 2003년 그 책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흥미롭다고는 생각했지만, 어떻게 영화로 만들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전개가 굉장히 복잡했거든. 그러다가 이걸 내러티브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열대병>에도 한 남자의 전생에 대한 일화가 살짝 나온다. 문제는 전생 자체가 아니라 그 전생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의 문제라는 거다. 원작을 따라가지 않고 유년 시절 고향 마을에 대한 기억과 영화에 대한 내 개인적인 기억을 합쳐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넓게 말해 시간의 흐름에 따른 풍경의 면모를 영화 제작 환경의 변모와 연결시켰다. 영화의 운명적 변화에 대한 일종의 헌사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영화는 주인공 엉클 분미가 전생을 탐구하는 여정을 뒤따른다. 이번 영화에서 처음 고민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전생이란 테마를 강하게 부각시켰는데?
어릴 때부터 태국 신화나 미신, 유령의 존재에 사로잡혔다. 그런 관념에 둘러싸여 살았고, 신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어떤 것들에 매료됐다. 영화도 어떻게 보면 그 연장선상인 것 같다. 실재한다기보다 환상의 일환으로서 매력적인 거지. 환생이란 개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느낌을 갖고 있었다. 사람이 계속 태어나며 다른 형태의 삶을 취한다니, 얼마나 신비롭나! 게다가 특정 지역의 정치 사회적 압박 속에서 한 생명이 형태를 달리하며 사이클을 만들어나간다는 자체가, 영화적 주제로 삼기에 무척 흥미롭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정작 엉클 분미의 전생에 대한 설명은 뚜렷하지 않다. ‘짐승 같은 것’이란 표현이 고작이다.
애초에 어떻게 기억하는가를 테마로 삼았으니까. 전생은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고 봤다. 영화적으로 열어두고 싶었다. 공주나 물고기일 수도, 군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사운드로만 등장하고 보이지는 않는 벌레가 그의 전생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화 자체가 엉클 분미의 전생이었을 수도 있다.
-당신의 전작은 관객에게 어려운 영화란 평가가 많았다. 이번에는 어렵다기보다 파격적인 장면들이 몇몇 눈에 띄더라.
상상력을 많이 발휘했다.(웃음) 과거 한 태국 공주가 물고기와 수간하는 장면은 전적으로 내가 만들어낸 환상 장면이다. 임신한 공주가 출산을 앞두고 인간과 물고기의 혼혈일까 두려워하는 장면도 찍긴 찍었다. 하지만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DVD에는 수록할 수도 있겠지. 이런 장면들은 파격적인 이면에 역사적인 의미가 숨어 있다. 영화에서 공주는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기 위해 소유물을 모두 버리고 물고기에게 자신의 순결까지 바친다. 숲속에 숨어 사는 원숭이 유령과도 일맥상통한 설정이다.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에 초점을 맞춘 것인지 좀 더 설명해 줄 수 있나?
이번 영화의 배경으로 삼은 마을에는 과거 사회주의 시대, 정부의 폭압을 피해 숲으로 도망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정치적인 정황을 비유한 거지. 군대와 정부에 몰살당한 희생양들과 그 유령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자 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엉클 분미>에는 여러 층위의 시간이 존재한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두어 가지, 100가지의 층위도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이 그런 것 아닌가. 하나의 시간 흐름에 따라 사건이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따지고 보면 인생의 모든 것이 환영이고 환상의 연속이 아닐까.
-가급적 쉬운 이야기 구조로 관객의 이목을 끌려고 하는 할리우드 영화와 정반대의 노선이다.
오히려 내 영화가 더 단순하지 않나. 예전에 존경하는 한 태국 감독님과 얘기를 나눴다. 그가 그러더라. “당신 영화가 5년 전에 나왔다면 관객들이 훨씬 잘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맞는 말이다. 할리우드는 두 시간 동안 관객이 잠들지 않게 하기 위해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복잡하게 풀어내기 바쁘다. 하지만 나는 촌스럽지만 전통적인 영화 형식에 충실하고 싶다. 이번 영화를 통해 그런 정직하고 단순한 영화 만들기의 한 형태에 헌사를 바치고자 했다. 영화의 고전적인 장르에 대한 오마주도 있다. 35밀리 필름 한 릴이 보통 20분 분량이다. <엉클 분미>는 딱 여섯 개의 릴로 촬영됐다. 각 릴마다 색다른 스타일을 부여하며 나만의 관념을 입혔다. 첫 번째 릴은 내 고유의 스타일로, 두 번째 저녁식사 장면이 있는 릴은 TV 드라마 형식으로 강한 조명과 고전적인 편집을 사용했다. 세 번째는 강한 사운드와 점프컷으로 파격을 줬고, 네 번째는 ‘로열 코스튬 드라마’(Royal Costume Drama)라고 불리는 태국의 전통적인 드라마 형태에 맞춰 찍었다. 내 딴에는 여러 시도를 한 셈이지.(웃음)
-당신의 개인적인 영화적 경험도 그런 시도에 영향을 미쳤나?
물론이다. 태국 영화계는 매우 느리게 흘러왔다. 1980년대에 와서야 더빙 시스템이 도입됐을 정도다. 1980년대 후반 영화 제작 붐이 일면서 혁명이 시작됐다. 내가 보고 자란 건 그 직전인 1970년대의 영상 문화다. 당시의 TV 파일럿 프로그램과 만화책이 영감의 원천이 돼줬다. B급 호러무비와 고색창연한 태국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제목이 다 기억나진 않지만, 유령과 인간의 공존을 다룬 작품이 대다수였다. 아, 원숭이 유령의 겉모습이 <스타워즈> 시리즈의 츄바카를 닮았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웃음)
-영화적 순수성을 추구해 온 감독이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흥미롭다.
할리우드 재난 영화에는 지금도 관심이 많다. 고전적인 영화 화법을 사용하면서도 기술의 발전을 통해 특별한 재미를 제공할 수 있는 장르라 생각한다. 오랫동안 작업해 온 프로젝트 중 <유토피아>란 것이 있는데, 이게 SF 영화다.(웃음) 캐나다에서 촬영해야 하고, 제작비도 굉장히 많이 들 예정이라 밀어붙이진 못하고 있는데, 언젠간 완성해 낼 것이다. 장르적인 재미와 기술적인 면에서 가장 욕심이 난다. 이렇게 말하면 다들 놀라는데, 사실 SF적인 요소는 내 전작에도 쭉 있어왔다.(웃음)
-끊임없이 영화적인 탐구를 해나가는 듯하다. 디지털 영화제인 CinDi가 필름으로 촬영한 <엉클 분미>를 개막작으로 선정한 이유도 바로 그 혁신적인 면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영화의 혁신은 무엇인가?
영화 산업에 있어 지금은 흥미로운 시기다. 음악 산업처럼 배급과 유통 부문에서 변화가 일어나며 디지털 콘텐츠 배급에 대한 고민이 요구되고 있다. TV나 컴퓨터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 콘텐츠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해적 콘텐츠의 불법 다운로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도 결정해야 한다. 공짜 좋아하는 건 사람의 본성이잖나. 창작자에게 무리를 주지 않고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갈지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변화가 바로 혁신이다. 영화의 혁신은 다른 것이 아니다.
-최근 영화 내외적으로 다양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연출 면에서도 감각적이고 경쾌한 쪽에서 호흡이 길고 주제적으로 묵직한 스타일로 변화가 엿보인다. 향후에는 어떤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갈지 궁금하다.
영화가 뭘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많다. 다른 예술 작품처럼 일종의 브랜드를 갖고 싶다. 루이비통처럼 특정한 브랜드를 가지면 잘 팔리잖나.(웃음) 하지만 내 브랜드는 예측 불가능했으면 좋겠다. 엄격한 한계에 갇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어떤 것이 잘 팔리도록 하려면 사는 사람이 예측 가능해야 하지 않나?
음…. 사실 그렇긴 하다. 그럼 그 부분을 보완하겠다. 할리우드 스타를 캐스팅하면 예측 불가능해도 괜찮지 않을까? 안젤리나 졸리나 브래드 피트. 어떤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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