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상상/under-stage

[바냐아저씨]

유산균발효중 2010. 1. 16. 23:25

 

올 해의 시작은 이래저래 체홉과 함께 할 일이 많아졌다.

아르코에서 1.7~1.17까지 상연 중인 <바냐 아저씨>는 체홉의 4대 걸작으로 뽑힌다는데,

그의 걸작을 내 손으로 뽑을 만큼 그의 작품들을 정독하지는 않아서 이들의 우열은 다시 논의해 볼 일이다. 이제까지의 작품들이나 단편들을 읽은 인상은 당분간 체홉에 대한, 희곡에 대한 관심이 계속 될 것임을 예견할 뿐.

 

1.

고전극의 완성도는 배우들의 연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바냐아저씨의 배우들은 개성있는 각 인물들을 표현하기에 꽤 적당하고 출중했다. 엘레나 역이 조금 튀었는데, 그녀의 대사 마디 마디 강조되는 악센트가 좀 거슬렸다.

세레브랴꼬프 역의 배우는 내가 생각한 퇴직한 교수 역할과 다른 이미지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세레브랴꼬프는 평생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학계의 활동을 했지만, 그 이면에는 가족들을 희생시키고 자신의 오만함과 지적허영을 채워줄 노동을 필요로했던 사람이다. 부인이 죽고 딸 또래의 여성과 재혼을 할 정도의 매력과 예민함도 있는.. 하지만 이 연극에서 세레브랴꼬프를 맡은 배우는 늙은 지주에 가까웠다.

엘레나와 세레브랴꼬프의 미스캐스팅을 이제 그만 뒤로하고.

 

2.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연극의 무대 장치이다. 기하학적 모양의 틀과 나무 사이로 인물들은 자기만의 자리를 가지고 있다. 물론 틀의 모양, 의자의 모양도 다를 뿐 아니라, 각 인물이 앉는 방식과 소품도 다르다. 소냐와 바냐만이 남은 마지막 장면에서 각 인물들은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와 틀을 무대 가운데로 쭉 밀고 들어와 마치 감옥의 창살에 갇힌 듯 두 인물을 감싼다. 커튼 콜이 모두 마친 후, 빙빙 돌아가는 무대위, 각 인물은 역시 자신의 의자에 앉아있다.  그리고 처음과 같이 자기가 했던 일에 몰두 한다. 이것이 <바냐 아저씨>가 이야기 하는 핵심이자 전부라고 말하고 싶다.

 

3.

러시아의 정서는 책과 영화를 통한 간접체험이 전부이지만, 공통적인 인상이 존재한다.

 

이들은 그 문학이 써졌을 당시를 환기시킨다는 측면에 있어서 '고전'의 개념을 고수한다. (이는 꽤 유명한 비평가이자 블로거인 ㄹㅈ로부터 빌려온 고전의 두 개념이다. 고전은 그것이 쓰여진 시대를 환기한다는 측면에서의 고전,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다는 측면에 있어서의 고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둘은 동어반복같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또 전혀 그렇지 않다. 러시아의 고전은 배경이 없는 이야기를 설정하지 않으니까)

어쨌든, <바냐 아저씨>가 함축하는 고전의 요소는 지주-농노의 관계와 관련된다.

 

러시아 정서의 또 다른 공통적 인상은 노동에 대한 신성화이다. 이들에게 있어 노동은 일상과 떨어질 수 없고, 그 일상을 신성하게 만드는 것이자, 신의 계시에 응답하는 일이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등에게서도 이는 동일하게 나타난다.

노동의 신비. 일상의 신비.

 

 

4.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서, 이 희곡에서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인물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제목을 바꾸어도 될 것이다. 제목이 <바냐아저씨>라는 이유로 그에게만 집중하다보면, 애처로움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연극에서는 아스뜨로프와 옐레나의 관계, 옐레나가 아스뜨로프의 자유로움과 달란뜨에 호기심과 애정을 느끼는 것에도 많은 비중을 두었지만, 희곡에서 이 둘의 관계는 오히려 담백하다. 바냐가 총을 쏘는 장면을 클라이막스로 두지도 않았다. (이는 도진이 연출한 바냐와 비슷하다.)

 

체홉은 이 많은 인간 군상을 헤집고, 마치 아무일도 없던 일상처럼 되돌아간다. 물론 처음과 다른 몇가지가 존재한다. 이는 삶의 냉소적 진실을 발견한 두 인물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소냐: 떠났어요....바냐 아저씨, 뭐든 시작해요.

보이니쯔끼: 일을 해야지, 일을 해야지

 

.....9중략)

 

보이니쯔끼: 얘야, 나는 정말 괴롭구나!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너는 모를 거다!

소냐: 어떡하겠어요, 그래도 살아야지요!

 

사이,

 

소냐: 바냐 아저씨, 사는 거예요. 길고 긴 낮과 오랜 밤들을 살아 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들을 참아 내요. 지금도, 늙은 후에도, 쉬지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 그리고 우리의 시간이 찾아와, 조용히 죽어 무덤에 가면 얘기 해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하느님이 가엾게 여기시겠죠. 우리는, 아저씨, 사랑하는 아저씨, 밝고 아름답고 우아한 삶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는 기뻐하며 , 지금 이 불행을, 감격에 젖어 미소를 띠며 돌아보겠죠. 그리고 쉬는 거에요,....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아저씨는 즐거움을 모르고 살아왔지요, 하지만 기다려요, 바냐 아저씨, 기다려요.... 우리는 쉬게 될 거에요. (그를 안는다.)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쩰레긴은 나지막이 기타를 치고 있다. 마리아 바실예브나는 책자 가장자리에 뭔가를 쓰고있다. 마리나는 발싸개를 뜨고 있다.

 

소냐: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5. 언제나 나은 미래를 생각하며 사는 소냐와 괴로움과 절망에 현재를 담보로 내준 바냐는 그렇게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일을 하면서.

언젠가는 행복해 하며 쉴 날을 고대하면서.

하지만 그런 날이 올까?

그런날이 굳이 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살아가야겠지?

 

체홉이 전하는 정확하고도 당연한 일상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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