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유토피아 시대의 예술
자크 랑시에르,『감성의 분할』
알튀세르(L. Althusser)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저술한『자본 읽기』(Lire le Capital, 1965)의 공저자로서 이름을 알렸던 자크 랑시에르(J. Rancière)가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감성의 분할』과 함께 다시 한국의 독자들을 찾아왔다.
발리바르(E. Balibar), 마슈레(P. Macherey) 등과 더불어 알튀세르 학파의 일원이었던 그는 70년대에『알튀세르의 교훈』(La Leçon d'Althusser, 1974)의 출판을 통해 자신의 스승과 단절의 선을 긋는다. 그 이후 그는『프롤레타리아의 밤』(La nuit des prolétaires, 1981),『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 1987)등을 통해 독자적인 정치적 이론을 수립해 나간다. 이 시기에 그의 작업이 보여주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대중들은 누가 대신 대변을 해야만 하는 말없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표현할 줄 아는 말하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해방은 무지한 대중이 가르침을 받아 깨우쳐짐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고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둘째, 그들의 말에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세계를 담고 있다. 이 새로운 세계의 구성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정치이다.
19세기 노동운동의 문서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르렀던 이러한 결론들은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불화』(La mésentente. 1995)에서 보다 체계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 랑시에르에게, 정치의 출발점은 평등이다. 이 평등은 정치가 목적으로서 달성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말하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평등하다. 그렇다면 말(logos)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특정한 질서, 특정한 세계를 구성할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어진 어떤 정치적 질서 하에서 어떤 말, 어떤 감성은 의미있는 말과 감성으로서 간주되지 않고, 단지 웅얼거림으로서 혹은 동물적 감성으로 취급된다. 정치는 특정한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는 이러한 말과 감성이 그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 주장은 말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구성함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치란 이렇게 어떤 말 혹은 질서가 말로서 인정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논쟁하는 ‘불화’의 상황이다. 그런데 존재하는 질서에 대한 침입과 새로운 질서의 구성으로서의 정치에서 일차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이 바로 ‘감성의 분할’(partage du sensible)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감성의 분할은 “공통적인 어떤 것의 존재와, 거기에서 각자가 갖는 지위와 몫을 규정하는 경계설정들을 동시에 보여주는 감성적 명증성들의 체계”(『감성의 분할』, 13)이다. 여기에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감성이란 시공간의 분할이고, 그 분할에 따른 신체들의 배치를 의미한다. 우리가 보통 사회경제적 질서라고 부르는 것은 근원적으로 바로 이 감성의 분할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면, 여성들은 오랫동안 집이라는 공간과 가사일에 할당해야만 하는 시간의 규정 속에서 존재하였다. 그들의 존재방식, 말하는 방식 등은 바로 이러한 시공간적 분할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요컨대, 감성의 분할은 질서의 규정이며, 그 질서 속에 있는 존재들에 대한 규정이다. 정치는 새로운 감성의 분할, 새로운 시공간적 배치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여성들이 더 이상 집이라는 제한적 공간 안에 묶여 있지 않게 되고, 가사일을 해야만 했던 시간을 사색을 위한 시간으로 바꾸면서, 그들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혹은 정치적 주체로서 등장한다. 바로 여기에서 정치는 존재한다.
이렇게 정치가 감성의 분할의 문제로서 규정되는 한에서, 정치는 미학과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술적 실천들 또한 감성의 분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은 정치와 분리불가능하다. 이것은 예술이 정치에 봉사해야 한다는 참여 예술의 주장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은, 예술은 그 자체로, 그것이 감성의 분할에 관계하는 한에서, 필연적으로 이미 정치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소책자『감성의 분할』은 무엇보다도 정치와 미학 사이의 이 필연적 연관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면, 플라톤이 비판하였던 ‘문자’(l'écriture)라는 예술형식은 어떤 의미에서 그 자체로 정치적인가? 문자는 특정한 사람으로부터 특정한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저자의 고유성(예를 들면 사회적 지위 등)이 삭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나에게 전달된다. 한마디로 문자는 무차별적이다. 플라톤이 자신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은, 위계적 질서의 교란으로서의 바로 이 “문자의 무차별적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이 동일한 예술적 형식은 그것이 갖는 바로 그 무차별성의 힘에 의하여 칸트와 독일낭만주의로부터 시작되는 “미학적 예술체제”를 특징짓는 예술형식이 된다.
랑시에르는 이렇게 미학의 정치성을 설명한 후, 예술이 집단적 삶의 조건들을 전화시킬 수 있다는 미학적 유토피아가 붕괴된 이후의 시대 즉 포스트-유토피아 시대의 예술에 대한 상이한 미학적 주제들과 담론들을 분석한다. 랑시에르의 일차적 목적은 이러한 담론들에 대한 논쟁적 개입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이 담론들이 어떠한 조건 속에서 출현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 조건은 물론, 랑시에르가 예술에 대한 플라톤의 “윤리적 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적 체제”와 구별해서 ‘미학적 체제’라고 부르는 것에 있다. 랑시에르가 예술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담론들로서 규정하고 있는 것들은, 바로 이 미학적 예술체제에 내재하고 있는 모순의 특정한 표현으로서 나타난다.
미학은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탄생하였다. 그런데 이 예술의 자율성은 동시에, 예술적 형식들과 그것에 의해서 형성되는 삶의 형식들과의 동일성을 함축한다. 다시 말하면, 미학적 예술체제에서 예술의 자율성은, 자신의 반대 즉 예술과 삶의 일치를 함축한다. 이것은 예술이 감성의 분할에 관계 맺고 있는 한에서, 동시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서 필연적이다. 예술은 바로 그 순수성에 의해서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현대예술에 대한 대표적인 담론들은 미학적 예술체제가 갖는 이 모순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로서 읽힐 수 있다. 여기에서 특별히 랑시에르의 검토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리요타르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던 예술이론이다.
리요타르(F. Lyotard)는 무엇보다도 이념과 감성 사이의 환원불가능한 거리를 강조한다. 관념이나 개념으로 현시불가능한 고유한 감각을 그는 숭고의 감정을 통해서 개념화한다. 리요타르에게서 숭고는 하나의 미적 체험이기를 넘어서 예술 일반을 규정짓는 것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1세기 전부터, 예술은 더 이상 미가 아니라, 숭고에 관련된 어떤 것을 주요 논점으로 갖는다”고 단언한다. 요컨대, 예술은 어떤 보편적 규칙이나 규범에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어떤 독특한 경험을 증거하는 것이어야 하고, 따라서 이질적인 어떤 형식의 출현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것은 예술적 형식들과 실천들이 일상적인 삶과 뒤섞이고, 그럼으로써 예술이 상업과 구분되지 않는 예술적 현실에 비판의 의미를 가지며, 예술의 순수성 혹은 신성함을 지켜내려는 한 시도이다. 여기에는 허위적이고 가상적인 것 배후에 가려져 있는 진실한 무엇이 존재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리고 예술은 이 진정한 것을 담보해야 한다는 요청이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리요타르의 이 요청은, 윤리적인 것이다. 그런데 현대 미학적 담론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윤리적 전회’(tournant éthique)는, 랑시에르가 보기에는 예술의 정치성을 봉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러한 윤리적 담론에서는 새로운 감성적 분할이 아니라 오직 선과 악만이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위 현대예술에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미 존재하는 세계 속에 있는 대상들과 이미지들의 재배치로서의 예술에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예술의 정치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형식, 새로운 감성의 질서의 출현일 수도 있지만, 상업적 관계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일상적 삶에로의 예술의 포획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상상 > beyond-le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채운-재현이란 무엇인가 (1) | 2009.12.10 |
---|---|
인식론과 존재론 (0) | 2009.12.04 |
여기는 (0) | 2009.11.17 |
‘자기배려의 기술’에 내포된 정치적 메시지 (0) | 2009.11.04 |
2009년 출간될 주요 인문·사회 서적 (0) | 2009.10.30 |